엔터테인Home >  엔터테인 >  책
실시간뉴스
실시간 책 기사
-
-
빅브라더는 죽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던지는 섬뜩한 경고
- 1949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시대에 출간된 한 편의 소설이 미래 사회에 대한 가장 어둡고 통찰력 있는 예언서로 자리매김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순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넘어, 전체주의의 작동 원리와 인간 정신의 말살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든 위대한 문학적 성취다. 그가 그려낸 1984년은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빅브라더', '사상경찰', '이중사고'와 같은 소설 속 개념들은 21세기 디지털 감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띤다. 1. 진실을 꿈꾼 한 남자의 처절한 몰락 '1984'의 무대는 전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개의 초거대 국가로 재편된 1984년의 런던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The Party)'의 하급 당원으로, 진리부(Ministry of Truth) 기록국에서 과거의 신문 기사나 문서를 현재 당의 방침에 맞게 수정·조작하는 일을 한다. 1) 통제된 세계와 내면의 반란 오세아니아는 당의 최고 지도자인 '빅브라더(Big Brother)'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절대적인 감시 사회다. 거리와 가정에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Telescreen)'이 설치되어 시민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24시간 감시하며, 사상범죄를 색출하는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암약한다. 당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슬로건 아래 역사를 끊임없이 날조한다. 언어 또한 '신어(Newspeak)'라는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여, 반역적인 사상을 표현할 단어 자체를 소멸시키려 한다. 이 질식할 듯한 통제 속에서 윈스턴은 희미하게 남은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모순에 회의를 품는다. 그는 금지된 행위인 '일기 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심을 기록하며 위태로운 내면의 반란을 시작한다. 그는 당의 고위 간부로 보이는 '오브라이언(O'Brien)'에게서 자신과 같은 의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동질감을 느끼고, 당돌한 젊은 여성 '줄리아(Julia)'와 마주치면서 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2) 금지된 사랑과 짧은 해방 어느 날, 줄리아는 윈스턴에게 몰래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힌 쪽지를 건넨다. 당은 성욕을 오직 출산을 위한 의무로만 규정하고 개인적인 쾌락과 사랑을 철저히 통제하기에,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체제에 대한 반역 행위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사상경찰의 눈을 피해 런던 외곽의 숲이나 무산계급(Proles)이 사는 지역의 한 낡은 방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성의 영역이자 정치적 저항 행위였다. 특히 줄리아는 당의 이념에는 무관심하지만, 규칙을 어기고 개인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을 즐기는 인물로, 이념적 반역을 꿈꾸는 윈스턴과는 다른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한다. 이 짧고 위험한 밀애의 시간 동안 윈스턴은 잠시나마 해방감과 인간적인 유대를 맛본다. 3) 거짓 희망과 잔혹한 함정 저항에 대한 갈망이 커진 윈스턴은 마침내 오브라이언에게 접근한다.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당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 '형제단(The Brotherhood)'의 일원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킨 뒤, 조직의 강령이 담긴 '그 책(The Book)'을 건네준다. 윈스턴은 책을 읽으며 당의 지배 구조와 이데올로기(영사주의, 영원한 전쟁의 본질, 이중사고 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윈스턴과 줄리아가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던 낡은 방의 그림 뒤에는 텔레스크린이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윈스턴은 그토록 동경했던 오브라이언이 사실은 사상경찰의 핵심 간부이자 자신을 오랫동안 감시하고 유인해 온 장본인임을 깨닫게 된다. 4) 파괴되는 인간성, 그리고 '101호실' 체포된 윈스턴은 애정부(Ministry of Love)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고문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오브라이언이다. 고문의 목적은 자백이나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윈스턴의 저항 의지를 꺾고, 그의 생각을 완전히 개조하여 당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2+2=5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당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곧 진리이며, 객관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요한다.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윈스턴의 저항은 서서히 무너진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줄리아에 대한 사랑이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었다. 당은 그의 마지막 인간성마저 파괴하기 위해 그를 '101호실'로 보낸다. 101호실은 개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 공포의 한계점을 시험하는 곳이다. 쥐를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윈스턴의 얼굴에 굶주린 쥐들이 든 철창이 씌워지자, 그는 이성을 잃고 절규한다. "나한테 하지 마! 줄리아한테 해!" 이 한마디는 그의 내면에 남은 마지막 인간성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석방된 윈스턴은 과거의 모든 기억과 감정이 거세된 채, 오직 빅브라더에 대한 사랑과 순응만이 남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줄리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잃고 서로를 배신했음을 무감각하게 확인한다. 소설은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전쟁 승리 소식을 들으며 윈스턴이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투쟁은 완벽한 패배로 끝났고, 체제는 한 개인의 정신을 완전히 정복했다. 2. '1984'는 무엇을 말하는가? 1) 전체주의와 절대 권력의 속성 '1984'는 전체주의 체제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는지를 해부한다. 당은 물리적인 통제를 넘어 역사, 언어, 생각, 심지어 사랑이라는 가장 내밀한 감정까지 지배하려 한다. 오웰은 권력의 본질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목적임을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명확히 밝힌다. 당은 인류를 고문하고 굴복시키면서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권력의 비인간적이고 자기 증식적인 속성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2) 감시 사회와 프라이버시의 종말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소설 속 문구는 현대 사회의 감시 문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 속 텔레스크린은 오늘날의 CCTV, 인터넷 검열, 개인정보 수집, 안면 인식 기술 등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견한다. 오웰은 외부의 감시가 내면화될 때, 즉 개인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될 때 진정한 자유는 소멸한다고 경고한다. 프라이버시의 상실은 단순히 사생활이 노출되는 문제를 넘어,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3) 언어와 사고의 통제 신어(Newspeak)와 이중사고(Doublethink) 오웰이 창조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신어'와 '이중사고'다. 신어는 어휘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사상의 폭을 좁히고, 최종적으로는 '사상범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언어다. '자유'라는 단어는 남아있지만, '정치적 자유'나 '개인의 자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 개는 벼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식의 한정된 의미로만 사용된다. 이중사고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둘 다 사실이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당의 슬로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고, 체제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심리 통제 수단이다. 오늘날 '가짜뉴스'와 '탈진실' 현상이 만연한 시대에, 이중사고의 개념은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갖는다. 3. 왜 지금 다시 오웰인가? 조지 오웰의 '1984'가 출간된 지 7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영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인공지능, 빅데이터,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21세기에 그의 경고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각국 정부와 거대 테크 기업들은 막대한 양의 개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빅브라더'의 출현을 예고한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 듣는 정보를 필터링하여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조작하고 객관적 진실의 가치를 위협하며, 사회적 불신을 팽배하게 만든다. '1984'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을 위해 얼마만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내어줄 수 있는가? 진실이 권력에 의해 왜곡될 때,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는 무엇인가? 소설의 결말은 지독히도 비극적이지만, 오웰이 이 작품을 쓴 목적은 절망적인 예언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1984'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명작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성찰하며, 자유와 진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책무를 확인하는 행위다. 빅브라더는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
- 엔터테인
- 책
-
빅브라더는 죽지 않았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던지는 섬뜩한 경고
-
-
'병신과 머저리', 상처의 시대에 던져진 지식인의 자기 구원
- 병신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죄책감으로 인해 일상적 삶을 포기하려는 정신적 상처를 가진 형을, 머저리는 자신의 아픔이나 환부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는 동생을 의미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지식인(병신), 그리고 그 무력감을 냉소와 현실 안주로 덮어버리려는 지식인(머저리)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를 읽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스스로 헤집어 그 고름을 짜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1966년 발표된 이 소설은 4.19 혁명이라는 역사적 격동 이후, 이상은 좌절되고 현실은 방향을 잃었던 시대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와 무력감을 형과 동생이라는 두 인물의 대립을 통해 치밀하게 파고든다. 형은 전쟁의 상처를 예술(소설)로 승화시켜 극복하려는 '창작하는 지식인'을, 동생은 그 상처를 외면하고 냉소와 폭력으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행동하는 지식인'을 상징한다. 두 형제의 갈등은 단순한 가족의 불화를 넘어, 60년대 한국 사회가 겪었던 가치관의 혼란과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거대한 알레고리다. '병신과 머저리'는 상처를 마주하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한 지붕 아래 두 개의 상처, 형과 동생 1부: 소설가 형,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고통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화가이자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한국 전쟁 당시 낙오병이었던 한 소녀와의 비극적 만남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는 부상당한 소녀를 간호하지만, 결국 그녀를 죽음의 공포 속에 버려두고 혼자 탈출한다. 이 죄책감과 무력감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괴롭히는 거대한 트라우마다. 그는 이 고통을 소설이라는 예술 행위를 통해 객관화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2부: 외과의사 동생, 상처를 부정하는 자 그의 동생은 촉망받는 젊은 외과의사다. 그는 형의 소설을 "궤변과 자기변명"이라며 경멸하고, "인간의 아픔 같은 건 수술로 도려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다. 그는 겉으로는 냉철하고 성공한 지식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 역시 깊은 상처로 뒤틀려 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실수로 어린 소녀 환자를 수술대 위에서 죽게 한 충격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형처럼 자신의 상처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처를 부정하고, 세상에 대한 냉소와 폭력적인 행동으로 고통을 잊으려 한다. 그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간호사 순이를 학대하며, 형의 소설 쓰기를 "병신 같은 짓"이라며 조롱한다. 3부: 갈등의 폭발, 두 개의 총성 형제의 갈등은 형이 쓰는 소설의 결말을 두고 폭발한다. 형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결국 소녀를 구원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남겨지는 결말을 구상한다. 이는 자신의 죄의식을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동생은 이 결말을 참지 못한다. 그는 형의 소설이 자신의 실패(수술 실패)를 암시한다고 느끼며 격분한다. 그는 형에게서 총을 빼앗아 들고 소설 속 주인공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나약한 관념론자"인 형을 단죄하려 한다. 그는 형의 다리에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힌다. "형은 병신이야. 우린 이제 둘 다 똑같은 병신이란 말이다!" 동생의 총성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가 결국 파국을 통해 형과 같은 '상처 입은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역설적인 행위다. 4부: 상처의 봉합, 그리고 새로운 시작 총을 맞고 쓰러진 형은 오히려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동생이 쏜 총은 현실의 상처였지만, 그로 인해 그는 비로소 과거의 관념적인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는다. 그는 생각한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설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고. 그는 동생이 낸 상처를 딛고 일어나, 무력하게 소녀를 죽게 내버려 뒀던 소설의 결말을, 주인공이 소녀의 죽음을 끌어안고 함께 죽는 결말로 고쳐 쓴다. 이는 더 이상 과거의 방관자가 아니라,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동생이 남긴 상처를 통해 형은 비로소 자기 구원의 길을 찾은 것이다. 예술, 상처, 그리고 구원 형의 '소설 쓰기' vs 동생의 '수술하기' 이 소설의 핵심적인 대립 구도는 형의 '소설'과 동생의 '수술'이다. 소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언어로 표현하고 성찰함으로써 그 의미를 찾으려는 '정신적' 행위다. 고통스럽고 더디지만, 상처의 근원을 파고들어 진정한 치유에 이르려는 시도다. 수술: 눈에 보이는 육체의 상처를 칼로 도려내어 제거하는 '물리적' 행위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상처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외면한다. 작가는 동생의 방식이 보여주는 한계를 통해, 진정한 인간 구원은 상처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끌어안고 의미를 부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병신'과 '머저리'는 누구인가 제목의 '병신'과 '머저리'는 일차적으로는 형과 동생을 가리키지만, 더 넓게는 4.19 혁명의 좌절 이후 무력감에 빠진 당대 지식인 사회 전체를 향한 자기 비판적 명명이다.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는 지식인(병신), 그리고 그 무력감을 냉소와 현실 안주로 덮어버리려는 지식인(머저리). 이청준은 이 두 인물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증언하고 치유하려는 작가로서의 고뇌와 사명감을 드러낸다. 1960년대의 고뇌, 2025년의 우리에게 말을 걸다 '병신과 머저리'는 4.19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어떤 이는 그 상처를 곱씹고 성찰하며 성장의 발판으로 삼지만, 어떤 이는 상처를 외면하고 부정하며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상처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당신은 형처럼 고통스럽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동생처럼 총을 쏘는 사람인가. 개인의 트라우마 극복 문제부터,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비극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병신과 머저리'가 보여주는 상처에 대한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지적인 소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은 문학의 역할을 고민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묵직한 고전을 강력히 추천한다.
-
- 엔터테인
- 책
-
'병신과 머저리', 상처의 시대에 던져진 지식인의 자기 구원
-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교실 속 독재자를 통해 본 권력의 민낯
- 정의로운 저항은 왜 굴복하는가, 그리고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는 것은, 돋보기로 우리 사회의 가장 불편한 지점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1987년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이라는 지극히 작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한 시대의 폭압적인 권력 구조와 그에 기생하고 굴종하는 대중의 심리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압축되어 있다. 서울에서 온 자유주의자 한병태와, 그 교실을 완벽하게 장악한 독재자 엄석대. 두 소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파국을 통해, 작가는 정의는 왜 패배하고 불의는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발표된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학교 폭력 문제부터 직장 내 권력관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텍스트보다 현실적인 알레고리(allegory, 우의)로 읽히는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시대를 넘어 인간과 권력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우리 시대의 필독 고전이다. 한 소년의 전학, 그리고 시작된 싸움 1부: 이방인, 질서에 도전하다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잘나가던 학생 한병태가, 아버지의 좌천으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그가 마주한 5학년 2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급장인 엄석대가 담임선생님마저 묵인하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반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시험을 볼 때는 석대의 지시 아래 전교 1등부터 꼴찌까지 성적이 조작되고,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석대에게 도시락 반찬을 상납하며, 그의 폭력과 감시 아래 누구 하나 저항하지 못하는 '석대의 왕국'이었다. 서울의 합리적인 질서에 익숙했던 한병태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석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아이들에게 저항을 호소하며, 담임선생님에게 부정을 고발하는 등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2부: 고독한 저항, 그리고 패배 그러나 한병태의 저항은 무력했다. 반 아이들은 그를 돕기는커녕,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아'로 취급하며 따돌리고 괴롭힌다. 그들은 석대가 주는 '질서'와 '안정'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 역시 "뛰어난 한 명만 잘 관리하면 반 전체가 편하다"는 논리로 석대의 독재를 방관할 뿐이다. 결국 한병태는 고립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는 석대에게 굴복하고, 그의 시스템에 편입되는 길을 택한다. 석대가 주는 보호와 특권 속에서 그는 점차 저항의 의지를 잃고, 불의한 권력에 순응하는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석대의 왕국'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간다. 3부: 새로운 질서, 영웅의 몰락 그렇게 1년이 흐르고 6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부임하면서 석대의 왕국은 예기치 못한 균열을 맞는다. 젊고 이상주의적인 새 담임은 석대의 부정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아이들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대하며 민주적인 질서를 가르친다. 절대 권력의 비호가 사라지자, 어제까지 석대에게 충성을 바치던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돌변한다. 그들은 석대의 모든 비리를 앞다투어 폭로하고, 그를 조롱하며 집단으로 린치를 가한다. 그렇게 견고했던 '우리들의 영웅' 엄석대는 한순간에 '일그러진 영웅'으로 전락하여 교실에서 도망치듯 사라진다. 4부: 어른이 된 후, 남겨진 부끄러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한병태는 우연히 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되는 초라한 엄석대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는 승리감이나 안도감 대신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는 깨닫는다. 진정한 악은 엄석대라는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라, 그의 독재를 가능하게 하고 그에 기생하며 안주했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방관자들'이었음을. 그리고 그는 자문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엄석대의 시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교실, 독재자, 그리고 방관자들 작은 공화국, '교실'이라는 알레고리 이 소설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1970~8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적 독재 시대를 완벽하게 은유했다는 점이다. ①절대 권력자(엄석대), ②그 권력을 묵인하고 이용하는 기득권(담임선생님), ③권력에 저항하다 좌절하는 지식인(한병태), ④그리고 권력에 순응하며 기생하는 다수의 민중(반 아이들)의 구도는 당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영웅'인가, '괴물'인가 - 엄석대 엄석대는 단순히 힘센 골목대장이 아니다. 그는 폭력과 공포뿐만 아니라, '성적 관리'와 '질서 유지'라는 당근을 통해 아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교활한 통치자다. 그는 반 아이들에게 예측 가능한 질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다. 작가는 엄석대를 통해 절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타락시키고 시스템을 왜곡하는지를 보여준다. 저항과 굴종 사이 - 한병태 한병태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가장 깊이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정의감에 불타는 저항자였지만,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의 변절 과정은 독자들에게 "나라면 과연 달랐을까?"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통찰하게 한다. 일그러진 영웅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알레고리다. 엄석대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4·19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외부의 충격이나 시대의 변화로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생명력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사회 현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엄석대와 한병태, 그리고 다수의 방관자들을 발견한다. 학교: 교실 내의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 문제에서 힘의 논리와 방관의 심리는 그대로 재현된다. 직장: 부당한 상사의 지시에 침묵하고 순응하며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오늘날 직장인들의 생존 방식과 닮아있다. 사회: 비합리적인 여론 몰이나 '좌표 찍기'와 같은 온라인상의 집단 광기 속에서, 개인의 소신을 지키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굴종이다. 결국 이문열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진정한 영웅은 한 명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평범한 개인들의 연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과 연대에 실패했을 때 남는 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부끄러움'뿐이다. 당신은 저항자인가, 방관자인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나는 내 삶의 공간에서 엄석대의 폭력을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한병태처럼 저항을 포기하고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싶은 독자라면, 반드시 이 소설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것은 한 편의 잘 짜인 문학 작품을 넘어, 우리 자신을 비추는 날카로운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
- 엔터테인
- 책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교실 속 독재자를 통해 본 권력의 민낯
-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쏘다
- 한국 현대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1970년대 압축 성장의 그늘 아래 신음하던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대의 양심이자 문학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난장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 세계는, 동화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과 현실의 지독한 비루함이 충돌하며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철거 계고장 한 장에 무너져 내리는 삶의 터전, 굴뚝과 기계에 종속된 노동의 현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 '난쏘공'은 산업화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갈려 나간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과연 모두에게 공평한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원한 고전이다. 낙원구 행복동, 그곳엔 낙원도 행복도 없었다 1부: 철거 계고장, 날아든 사형선고 소설은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지독히 반어적인 이름의 무허가 판자촌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곳에는 신체적 장애(난장이)로 인해 평생을 사회적 약자로 살아온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대신해 굳세게 가정을 이끌어 온 어머니, 그리고 장남 영수, 차남 영호, 막내딸 영희,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의 집에 붉은 글씨의 '철거 계고장'이 날아든다. 한 달 안에 집을 비우지 않으면 강제 철거하겠다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통보다. 정부의 '도시 정화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삶의 뿌리는 송두리째 뽑힐 위기에 처한다. 보상으로 아파트 입주권이 나오지만, 판잣집 주민들에게는 입주할 돈도, 프리미엄을 노리는 투기꾼들로부터 입주권을 지켜낼 힘도 없다. 결국 그들은 평생의 보금자리를 헐값에 넘기고 거리로 나앉아야 할 운명에 처한다. 2부: 흩어지는 가족, 짓밟히는 꿈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망하지만, 장남 영수는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운동에 희망을 걸어보려 한다. 차남 영호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엇나가고, 막내딸 영희는 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입주권을 되찾으려 발버둥 친다. 아버지는 달을 향해 '작은 공'을 쏘아 올리며 무너져 내리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가 사는 땅은 그의 꿈을 비웃듯 더욱 가혹해지기만 한다. 영수는 부당한 노동 현실에 맞서 싸우다 결국 공장에서 쫓겨나고, 그의 동료는 사측의 음모에 휘말려 살인자가 된다. 세상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3부: 영희의 희생, 되찾은 종이 한 장 가족의 비극이 절정에 달하는 것은 막내딸 영희의 희생을 통해서다. 그녀는 가족의 입주권을 헐값에 사들인 부동산 투기꾼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순결을 잃고 그의 곁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던 영희는, 마침내 금고에서 입주권을 훔쳐 나오는 데 성공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가족의 꿈이 담긴 차가운 종이 한 장뿐이었다. 4부: 굴뚝 위에서 사라진 아버지 그러나 영희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그리고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를 전해 듣는다. 아버지가 인근 공장의 높은 벽돌 굴뚝 꼭대기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다, 결국 그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은공' 대신 자기 자신을 쏘아 올렸지만, 그가 도달한 곳은 하늘이 아닌 차가운 굴뚝 바닥이었다. 아버지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었던 시대의 약자들이 꾸었던 덧없는 꿈의 상징으로 남는다. 난장이, 공, 그리고 굴뚝 '난장이'와 '거인'의 세계 소설에서 '난장이'는 단순히 키가 작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제대로 된 몫을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그의 가족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법과 제도는 언제나 가진 자들의 편이다. 작가는 이 '난장이'와 '거인'의 비대칭적인 구도를 통해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을 극명하게 고발한다. 희망과 절망의 상징, '작은 공' 아버지가 쏘아 올리는 '작은 공'은 이 소설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①빼앗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싶은 소망, ②이 부조리한 땅을 벗어나 달나라와 같은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은 꿈, ③그리고 결코 현실에 가닿을 수 없는 약자의 처절한 희망 그 자체다. 공은 하늘로 솟구치지만 이내 땅으로 떨어지듯, 그들의 꿈 역시 번번이 좌절된다. 산업화의 무덤, '벽돌 굴뚝'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오른 '벽돌 굴뚝'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난장이에게 그곳은 하늘로 가는 통로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거대한 무덤이었다. 이는 산업 발전의 성과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희생시키는 비정한 현실을 은유한다. 아름다운 문장, 잔혹한 현실 '난쏘공'이 시대를 넘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토록 참혹한 현실을 지극히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접적인 분노나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마치 동화를 쓰듯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인물들의 슬픔을 담아낸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독자들이 감정적인 동요를 넘어, 비극의 본질을 더욱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또한, 소설은 난장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12편의 단편이 묶인 연작(連作) 형식이다. 이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하나의 거대한 비극을 완성한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획일적인 시선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당대 사회의 복잡한 모순과 각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문학적 장치다. 2025년, 우리는 다시 '난쏘공'을 읽는다 '난쏘공'이 출간된 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판자촌은 화려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난장이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 앞에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청년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젠트리피케이션),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21세기의 '난장이'들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저마다의 '작은 공'을 하늘에 쏘아 올리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다. '난쏘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유효한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의 고통에 눈감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이라는 작은 공을 다시 한번 쏘아 올리는 행위가 될 것이다.
-
- 엔터테인
- 책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쏘다
-
-
'무진기행', 안개와 허무 속에서 발견한 현대인의 자화상
- 김승옥이 그려낸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구원이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1960년대 한국 문학은 김승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소설 '무진기행'을 읽는 것은, 짙은 안갯속을 홀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경험이다. 그의 문장은 이전 세대의 작가들이 짊어졌던 전쟁의 상흔이나 이념의 무게 대신, 전후(戰後) 근대화의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미묘한 허무와 소외, 속물적 욕망과 자기혐오를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냈다. '무진(霧津)', 즉 안개 나루. 이곳은 지도에 없는 허구의 공간이자,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모든 현대인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심리적 도피처다. 주인공 윤희중의 짧은 귀향길을 따라가는 '무진기행'은, 일상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 얼마나 허망하며, 그 끝에 남는 것이 결국 '부끄러움'뿐임을 통찰한 우리 시대의 영원한 문제작이다. 안개 속으로의 며칠, 한 남자의 여정 1부: 성공이라는 감옥, 서울을 떠나다 소설은 제약회사 전무인 주인공 '나'(윤희중)가 아내의 권유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고향인 '무진'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장인의 재력과 아내의 적극적인 처세 덕에 젊은 나이에 상류층으로 편입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성공의 안락함 대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무력감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서울은 '성공'이라는 이름의 감옥이며, 무진으로의 여정은 그 감옥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출, 즉 '도피'다. 2부: 안개의 도시, 무진에서의 만남 그가 도착한 무진은 명물인 '안개'에 휩싸여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들고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 속에서 그는 과거의 인물들을 만난다. 세무서장이 되어 속물로 변해버린 동창, 그리고 한때 연모했던 후배의 자살 소식은 그에게 무진 역시 더 이상 순수의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그러던 중 그는 모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을 만난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꽤 유명한 노래인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서울로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속물적인 모습과 동시에 어딘가 자신과 닮은 공허함을 발견하고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현실 도피의 동반자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함께 서울로 가자고 제안한다. 3부: 도피의 끝, 아내의 편지 하인숙과 함께 무진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짧은 환상은, 서울의 아내로부터 온 한 통의 전보로 산산조각 난다. "早歸. 急報(조귀. 급보)", 즉 "빨리 돌아오라. 급한 소식이다"라는 단 네 글자. 이 전보는 그에게 무진에서의 일탈이 끝났음을 알리는 '명령'이자, 그가 속한 현실 세계로의 '소환장'이다.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 끝에 하인숙을 무진에 남겨두고 서울행 버스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의 도피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4부: 무진을 떠나며, 그리고 남겨진 것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하인숙에게 남기고 온 편지를 떠올린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을 떠난다는, 지독히 위선적이고 변명에 가득 찬 문장이다. 그는 그 편지가 결국 하인숙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짧은 여정 끝에 남은 것은 사랑의 성취나 자유의 획득이 아닌, 자신의 비겁함과 속물근성을 확인한 '부끄러움'뿐이었다. 안개, 편지, 그리고 부끄러움 '안개'의 다층적 상징 '무진기행'에서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①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 ②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 ③일상의 책임과 의무로부터 잠시 숨을 수 있게 해주는 익명성의 공간, ④그리고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허무 그 자체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무진의 안개 속에서 잠시 위안을 얻지만, 안개가 걷히면 결국 냉정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일상으로의 복귀 명령, '편지(전보)' 아내의 전보는 소설의 흐름을 가르는 결정적 장치다. 그것은 주인공을 지배하는 현실 세계의 권력(아내와 장인으로 대표되는)을 상징하며, 개인의 낭만적 일탈이 얼마나 쉽게 현실의 질서 앞에 좌절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짧은 전보 앞에서 그의 모든 결심과 환상은 힘없이 무너진다. 현대인의 실존적 감각, '부끄러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무진기행'의 핵심 주제다. 이 부끄러움은 하인숙을 버린 것에 대한 단순한 미안함이 아니다. 그것은 ①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속물근성에 대한 부끄러움, ②진정한 사랑이나 순수한 열정 대신 위선적인 변명으로 자신을 포장한 비겁함에 대한 부끄러움, ③그리고 결국 일상이라는 감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실존적 자기혐오다. 1960년대의 이방인, 윤희중과 우리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영웅도, 악인도 아니다. 그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근대화의 길목에 서 있던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방황을 대변한다. 그는 가난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싶어 하지만, 속물적인 성공 속에서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단지 1960년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을 꿈꾸지만, 결국 책임과 안정이라는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그의 고뇌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무진'을 품고 산다. 그곳으로의 짧은 도피를 꿈꾸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와 어제의 삶을 반복한다. 김승옥은 바로 그 지점,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마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비겁함과 그로 인한 '부끄러움'의 감정을 놀랍도록 세련되고 감각적인 문체로 포착해냈다. 당신은 당신의 '무진'을 떠났는가 '무진기행'은 발표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일상에 안주하는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당신의 '무진'은 어디이며, 그곳으로부터의 도피는 당신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일상이라는 궤도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 있는 독자라면, 이 안개 자욱한 도시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그 끝에서 당신은 아마도, 지독한 부끄러움과 함께 자신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위대한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불편하고도 귀한 선물이다.
-
- 엔터테인
- 책
-
'무진기행', 안개와 허무 속에서 발견한 현대인의 자화상
-
-
'아Q정전', 죽지 않고 우리 곁을 떠도는 망령의 이름
-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자의 '승리' 기록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 의학을 공부하다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보다, 병든 정신을 고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며 붓을 든 작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魯迅). 그의 대표작 '아Q정전(阿Q正傳)'은 1921년 발표된 이래, 지난 100년간 중국인의 자화상이자, 때로는 동아시아인 모두의 부끄러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해왔다. 주인공 '아Q'는 성(姓)도, 이름도, 심지어 고향조차 불분명한 최하층 날품팔이꾼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황제나 영웅보다도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창시한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이라는 기이한 자기 위안 방식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아Q라는 한 인물의 우스꽝스럽고도 비참한 일생을 통해, 봉건 왕조가 무너지고 혁명의 열기가 들끓던 시대의 한복판에서조차 변하지 않았던 중국 민중의 노예근성과 자기기만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1부: 웨이주앙의 천덕꾸러기, 아Q 아Q는 웨이주앙(未庄)이라는 가상의 농촌 마을에 사는 막노동꾼이다. 그는 집도 절도 없이 사당에 얹혀살며,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는 것은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아Q에게는 자신만의 비범한 대처법이 있다. 바로 '정신승리법'이다. 건달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난 뒤, 그는 침을 뱉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아들놈에게 맞은 셈이다. 요즘 세상은 정말 막돼먹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맞은 것은 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가 승리자가 된다. 도박판에서 돈을 잃으면 자신의 뺨을 때리며, '때린 놈'이 된 자신을 '맞은 놈'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는 현실의 모든 패배와 굴욕을 이 기상천외한 정신승리법을 통해 심리적 승리로 둔갑시키며 살아간다. 2부: 추락하는 자의 헛된 욕망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비굴한 아Q의 삶은 연이은 굴욕으로 점철된다. 그는 마을의 젊은 비구니를 희롱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마을의 지주인 자오 나리의 집 하녀에게 수작을 걸다가 '불륜을 저지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배워서 돌아온다. 갑자기 돈과 옷이 생긴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잠시나마 대우해준다. 생애 처음으로 받아보는 존중에 아Q는 의기양양해지지만, 그의 허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3부: 혁명, 그리고 너무나 허무한 죽음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바람이 웨이주앙 마을까지 불어온다. 아Q에게 '혁명'은 어려운 사상이 아니었다. 그저 '내 맘에 드는 것은 다 내 것'이 되는,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신나는 기회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혁명당원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평소 자신을 무시했던 자오 나리의 집을 약탈할 꿈에 부푼다. 하지만 혁명은 아Q의 편이 아니었다. 마을의 지주와 유학자들은 하루아침에 감투를 바꿔 쓰고 '혁명 정부'를 자처하며, 기존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들은 아Q 같은 부랑자는 혁명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며 그를 철저히 배제한다. 혁명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아Q는,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이자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오 나리의 집이 진짜 도적떼에게 습격당한다. 혁명당원이 되겠다며 설쳤던 아Q는 완벽한 희생양이 된다. 그는 졸지에 강도죄의 주범으로 몰려 관아로 끌려간다. 글을 모르는 그는 자신이 무엇에 서명하는지도 모른 채, 붓을 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라는 말에 열심히 원을 그린다. 수박씨처럼 삐뚤어진 원을 보며,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고 한탄하는 그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결국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그는 자신을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을 본다.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총살은 참수보다 구경거리가 못 될 텐데'라는 실없는 걱정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허무하게 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싱거운 구경거리였다며 불평하며 흩어진다. 루쉰이 던진 세 가지 날카로운 질문 하나, '정신승리법'은 누구의 것인가? 아Q의 정신승리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어리석은 성격이 아니다. 루쉰은 이를 통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연이어 패배하면서도, '중화사상'이라는 허울 속에 갇혀 자신들의 패배를 직시하지 못했던 당시 중국 전체의 정신 상태를 비판했다. 현실의 패배를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정신적인 자위를 하는 것으로는 결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통렬한 경고였다. 둘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아Q정전'은 신해혁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문학적 비판이다. 루쉰이 보기에, 신해혁명은 황제의 성을 바꾸고 깃발의 색깔을 바꿨을 뿐, 민중의 삶과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배층은 이름만 바꿔 기득권을 유지했고, 아Q와 같은 민중은 혁명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구경꾼으로 남거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셋째, 구경꾼은 죄가 없는가? 아Q를 괴롭히고, 그의 허세에 잠시 빌붙었다가, 그의 죽음을 무심하게 구경하는 웨이주앙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루쉰이 의학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도, 처형당하는 중국인을 동포들이 무감각하게 구경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고 나서였다. 그는 병든 개인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처럼 우매하고 냉담한 '군중'의 영혼을 깨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아Q의 비극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관하고 즐긴 군중 모두의 비극인 셈이다. 10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아Q 정신' '아Q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국과 중국에서 공공연히 쓰인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가 된 것이다. 100년 전 소설 속 인물이 이토록 생생한 현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때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우리가 원래 더 우월하다"는 식의 정신적 자부심에 기대어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려 하지는 않는가? '아Q정전'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자기기만으로 흐를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방주사와도 같다. 우리 안의 '아Q'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아Q정전'은 유쾌한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읽는 내내 불편하고, 때로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키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은 우리에게 편안함이 아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루쉰은 100년 전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낡은 중국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아Q는 총살당했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허상 속으로 도피하려는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
- 엔터테인
- 책
-
'아Q정전', 죽지 않고 우리 곁을 떠도는 망령의 이름
-
-
'붉은 수수밭', 광활한 대지 위에서 피고 진 생명의 원초적 찬가
- 2012년, 중국 국적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붉은 수수밭'이라는 다섯 글자가 따라붙는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고향이자, 중국 민중의 원초적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땅 '가오미향'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장대한 서사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빚어낸 그의 대표작이다. '붉은 수수밭'은 점잖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와 논리를 거부하는 거칠고 관능적인 언어의 향연이며,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폭력과 저항이 광활한 수수밭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편의 원초적인 서사시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잘 닦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고량주 냄새가 진동하는 대지 위를 맨몸으로 구르는 것과 같은 강렬한 문학적 체험이다. 신화가 된 가족의 역사 이 소설은 손자인 '나'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기억과 전설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재구성하는 독특한 비선형적 구조를 띤다. 역사는 명확한 연대기가 아닌, 신화처럼 뒤섞여 독자에게 전달된다. 1부: 나의 할머니, 다이펑롄 수수밭의 여신 이야기의 절대적인 중심은 '나'의 할머니 다이펑롄이다. 빼어난 미모와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당찬 성정의 소유자인 그녀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나병 환자인 양조장 아들 산볜랑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간다. 붉은 수수가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그녀가 탄 꽃가마가 흔들릴 때, 비극과 운명이 동시에 시작된다. 한 무리의 강도가 가마를 습격하고, 이때 가마꾼 중 한 명이었던 젊고 건장한 사내 위잔아오가 강도를 때려눕히며 그녀를 구해낸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교감이 흐른다. 결혼 후 3일째 되던 날, 친정으로 향하던 다이펑롄은 수수밭 한가운데서 위잔아오와 다시 마주친다. 그는 그녀를 수수밭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가고, 그곳에서 폭력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다. '나'의 아버지 더우관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산볜랑이 의문사를 당하고, 젊은 과부가 된 다이펑롄은 양조장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그녀는 탁월한 수완으로 양조장을 이끌며 모두의 존경을 받는 여장부로 거듭난다. 2부: 나의 할아버지, 위잔아오 대지의 아들 '나'의 할아버지 위잔아오는 문명과 질서를 거부하는, 원초적 에너지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는 다이펑롄의 연인이자 아들의 아버지이지만, 한곳에 얽매이지 못하고 결국 전설적인 마적 두목이 된다. 그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이지만, 동시에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영웅이기도 하다. 할머니 다이펑롄이 '정착하는 대지'의 여신이라면, 할아버지 위잔아오는 '떠도는 바람'과 같은 존재로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3부: 피로 물든 붉은 수수밭 (항일전쟁) 소설의 후반부는 일본군의 침략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폭력 앞에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과정을 처절하게 그린다. 일본군은 양조장의 큰어른이었던 뤄한 아저씨를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죽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마적 두목이었던 위잔아오는 항일 게릴라 부대의 사령관으로 변모한다. 그는 아들 더우관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군 수송부대를 상대로 수수밭에서 매복 작전을 펼친다. 생명의 공간이었던 수수밭은 이제 처절한 격전지가 된다. 게릴라 부대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이고 가던 할머니 다이펑롄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에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녀의 선혈이 수수밭을 적시면서, 생명과 정열을 상징했던 수수의 붉은빛은 이제 저항과 희생의 피 색깔로 변모한다. 신화의 퇴색 세월이 흘러, '나'의 시대에 이르러 수수밭은 더 이상 과거의 야생성을 간직하지 못한다. 품종 개량된 수수는 키가 작고, 그 안에서 더 이상 신화적인 사랑이나 영웅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가 보여주었던 그 원초적인 생명력이 사라져버린 현대를 쓸쓸하게 관조하며 끝을 맺는다. 신화와 역사, 감각의 서사 모옌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 모옌의 문체는 흔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비견되지만, 그 뿌리는 중국의 민간 설화와 구전 전통에 더 깊이 닿아 있다. 그의 묘사는 지극히 감각적이다. 코를 찌르는 고량주의 냄새, 끈적한 피의 감촉, 살갗을 스치는 수수잎의 소리,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 등, 독자는 이성과 논리가 아닌 오감으로 이 이야기를 체험하게 된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 속에서 재창조되는 '신화'로 그려진다. 붉은 수수의 다층적 상징 이 소설에서 '붉은 수수'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선 주인공이다. 수수는 ‘①삶과 풍요(고량주의 원료), ②정열과 자유(인습을 벗어난 사랑의 공간), ③저항과 희생(항일 투쟁의 격전지이자 피로 물든 대지), ④그리고 역사 그 자체(모든 것을 지켜보는 증인)’를 상징한다. 수수밭의 흥망성쇠는 곧 가오미향 사람들의 운명과 직결된다. 국가가 아닌, 민중이 써 내려간 저항의 역사 '붉은 수수밭'이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항일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공산당이나 국민당 같은 공식적인 주체가 아닌, 마적과 양조장 여주인 같은 민중의 시각에서 그렸다는 점이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거세된 자리에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끈질기고 야생적인 생명력 자체임을 모옌은 웅변한다. 이는 국가가 독점해 온 역사 해석에 대한 문학의 강력한 대답이다. '한(恨)'의 서사와 '생명력'의 서사 1980년대, 중국 문단에는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딛고 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심근(寻根) 문학'의 경향이 나타났다. '붉은 수수밭'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한(恨)'의 정서로 풀어내고 민족의 비극을 노래했던 동시대 한국 문학의 흐름과 흥미로운 비교점을 제공한다. 한국의 서사가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수동적 저항의 측면이 강하다면, '붉은 수수밭'은 고난에 맞서 '폭발하고 분출하는' 능동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찬미한다. 두 나라가 식민주의와 전쟁이라는 비슷한 역사의 상처를 각기 다른 문학적 방식으로 승화시킨 과정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학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체험 '붉은 수수밭'은 아름답거나 편안한 소설이 아니다. 폭력과 죽음, 원초적 욕망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계다. 하지만 그 혼돈의 중심에는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에 대한 뜨거운 긍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위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정제된 역사 기록이 아닌, 땅과 피 냄새가 진동하는 '날것'의 서사를 통해 중국 민중의 원초적 생명력을 느끼고 싶은 독자,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각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분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
- 엔터테인
- 책
-
'붉은 수수밭', 광활한 대지 위에서 피고 진 생명의 원초적 찬가
-
-
'허삼관매혈기', 피를 팔아 시대를 건넌 한 남자의 눈물겨운 해학
-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소설을 읽는 것은, 거대한 쇄빙선이 얼어붙은 강을 깨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의 대표작 '인생'이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또 다른 걸작 '허삼관매혈기'는 그 파도를 넘기 위해 제 몸의 피를 팔아야 했던 한 가장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심장을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만든다. '매혈(賣血)', 즉 피를 파는 행위. 이 섬뜩하고 비천하게 느껴지는 행위가, 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구원하는 가장 신성한 의식이자 유일한 수단이 된다. 작가 특유의 냉정한 시선과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유머, 즉 해학(諧謔)을 통해, '허삼관매혈기'는 지독한 비극을 가장 눈부신 가족애로 승화시킨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열한 번의 매혈, 한 편의 가족사 1부: 청년 허삼관, 피를 팔아 아내를 얻다 1950년대,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허삼관이 제사공장에서 누에고치를 실크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마을 어른들로부터 "몸이 튼튼하다는 증거이자, 피를 팔고 난 뒤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데운 황주 두 냥을 마시는 것이 진짜 사내의 호사"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피를 팔고, 그 돈으로 호기롭게 돼지 간과 황주를 즐긴다. 이 '매혈 후 의식'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최고의 미녀이자 '꽈배기 서시'라 불리는 허옥란에게 반한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허삼관은 다시 한번 피를 판 돈으로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며 끈질기게 구애하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일락, 이락, 삼락 세 아들을 둔 가장이 된다. 2부: 피보다 진한 아버지의 이름 가정의 행복은 "큰아들 일락이 허삼관의 아들이 아니라, 허옥란의 옛 애인이었던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산산조각 난다. 일락의 얼굴이 하소용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온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수치심에 분노하며 일락을 모질게 대한다. "남의 자식을 위해 돈을 쓸 수 없다"며 일락만 빼고 다른 두 아들에게만 국수를 사주는 그의 모습은 옹졸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일락이 싸움을 하다 상대방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고를 친다. 피해자 가족이 막대한 치료비를 요구하며 집에 쳐들어오자, 허삼관은 갈등에 휩싸인다. "내 아들도 아닌 놈을 위해 내 피를 팔 순 없다"고 소리치지만, 결국 그는 피를 팔아 치료비를 마련한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행한 매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 모르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되어간다. 3부: 위기의 순간마다 피를 파는 아버지 이후 허삼관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파도와 일상적인 위기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병원으로 가 피를 판다. 대기근의 시대에는 온 가족이 굶주림에 죽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몰래 피를 팔아 온 가족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국수 한 그릇씩을 사 먹인다. 문화대혁명의 시대에는 하방(下放) 운동으로 큰아들 일락이 시골 농촌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간염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아들을 도시의 큰 병원으로 데려오기 위해, 허삼관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단기간에 여러 차례 피를 판다. 피를 너무 많이 판 나머지 길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하는 그의 여정은 처절하고 눈물겹다. 둘째 아들이 속한 생산대의 대장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아내 허옥란이 병에 걸렸을 때도, 집에 손님을 대접해야 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긴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는, 가족의 생명수이자 위기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된다. 4부: 마지막 매혈, 그리고 눈물 세월이 흘러 시대는 안정을 찾고, 아들들은 모두 장성했으며, 가정 형편도 나아졌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피 파는 사람들을 본 허삼관은 문득 향수에 젖어 자신도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위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젊은 시절의 의식이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병원의 새로운 혈두(피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그의 나이 든 얼굴과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 "당신 피는 돼지 피나 다름없소. 아무도 사지 않소"라며 그를 모욕하고 쫓아낸다. 그 순간 허삼관은 무너져 내린다. 평생 가족을 구원했던 자신의 유일한 능력과 자부심의 원천이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서럽게 운다. "이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피를 팔 수가 없어. 나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야..."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세 아들과 아내 허옥란은 그를 찾아와, 자신들의 돈으로 그가 평생 먹고 싶어 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사준다. 이제는 아버지가 피를 팔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위로하면서. 허삼관은 가족의 위로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비극을 희극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위화 작가 특유의 '해학' '허삼관매혈기'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이토록 비극적인 이야기를 놀랍도록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지독한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투고, 허풍을 떨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 허삼관이 아내 허옥란과 벌이는 유치한 부부싸움, 피를 팔기 위해 물을 잔뜩 마셔 피의 양을 늘리려는 모습 등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러한 유머(해학)는 독자들이 비극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탁월한 장치다. '피'의 다층적 상징 소설에서 '피'는 단순한 혈액이 아니다. 그것은 ①돈이자 생계 수단, ②남성성의 증명, ③가족을 구원하는 성수(聖水), ④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다. 특히 일락의 친자 논쟁을 통해, 작가는 '혈연(血緣)'이라는 생물학적 피보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흘리는 '희생의 피'가 더 고귀하고 진실된 것임을 역설한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 음식을 통한 구원과 위로 피를 판 대가는 언제나 '음식'으로 돌아온다. 볶은 돼지 간, 국수, 옥수수죽 등. 소설 속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위로'이자 '구원'이다. 대기근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는 국수 한 그릇의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물겨운 장면 중 하나다. 소시민 가장, 허삼관과 우리들의 아버지 한국의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종종 과묵하고, 엄격하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허삼관은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옹졸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이다. 그는 국가나 이념을 위해 피를 팔지 않는다. 오직 내 가족의 배고픔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판다. 바로 이 지점이 허삼관이라는 인물에 전 세계 독자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그는 영웅이 아니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가족을 지켜내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영웅보다도 숭고하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가족의 가치가 중요해진 오늘날, 허삼관의 '가족 이기주의'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휴머니즘으로 다가온다. 세상 모든 아버지를 위한 찬가 '허삼관매혈기'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의 이야기를 가장 희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걸작이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허삼관의 어리석음에 웃다가, 그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고, 그의 숭고한 부성애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분, 지독한 비극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와 인간애의 힘을 믿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 엔터테인
- 책
-
'허삼관매혈기', 피를 팔아 시대를 건넌 한 남자의 눈물겨운 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