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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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Q정전', 죽지 않고 우리 곁을 떠도는 망령의 이름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자의 '승리' 기록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 의학을 공부하다 "병든 육체를 고치는 것보다, 병든 정신을 고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며 붓을 든 작가.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魯迅). 그의 대표작 '아Q정전(阿Q正傳)'은 1921년 발표된 이래, 지난 100년간 중국인의 자화상이자, 때로는 동아시아인 모두의 부끄러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해왔다. 주인공 '아Q'는 성(姓)도, 이름도, 심지어 고향조차 불분명한 최하층 날품팔이꾼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황제나 영웅보다도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창시한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이라는 기이한 자기 위안 방식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아Q라는 한 인물의 우스꽝스럽고도 비참한 일생을 통해, 봉건 왕조가 무너지고 혁명의 열기가 들끓던 시대의 한복판에서조차 변하지 않았던 중국 민중의 노예근성과 자기기만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1부: 웨이주앙의 천덕꾸러기, 아Q 아Q는 웨이주앙(未庄)이라는 가상의 농촌 마을에 사는 막노동꾼이다. 그는 집도 절도 없이 사당에 얹혀살며,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동네 건달들에게 얻어맞는 것은 그의 일상이다. 하지만 아Q에게는 자신만의 비범한 대처법이 있다. 바로 '정신승리법'이다. 건달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난 뒤, 그는 침을 뱉으며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아들놈에게 맞은 셈이다. 요즘 세상은 정말 막돼먹었어...' 이렇게 생각하면, 맞은 것은 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그가 승리자가 된다. 도박판에서 돈을 잃으면 자신의 뺨을 때리며, '때린 놈'이 된 자신을 '맞은 놈'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는 현실의 모든 패배와 굴욕을 이 기상천외한 정신승리법을 통해 심리적 승리로 둔갑시키며 살아간다. 2부: 추락하는 자의 헛된 욕망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비굴한 아Q의 삶은 연이은 굴욕으로 점철된다. 그는 마을의 젊은 비구니를 희롱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마을의 지주인 자오 나리의 집 하녀에게 수작을 걸다가 '불륜을 저지르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도둑질을 배워서 돌아온다. 갑자기 돈과 옷이 생긴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잠시나마 대우해준다. 생애 처음으로 받아보는 존중에 아Q는 의기양양해지지만, 그의 허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3부: 혁명, 그리고 너무나 허무한 죽음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바람이 웨이주앙 마을까지 불어온다. 아Q에게 '혁명'은 어려운 사상이 아니었다. 그저 '내 맘에 드는 것은 다 내 것'이 되는,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신나는 기회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혁명당원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평소 자신을 무시했던 자오 나리의 집을 약탈할 꿈에 부푼다. 하지만 혁명은 아Q의 편이 아니었다. 마을의 지주와 유학자들은 하루아침에 감투를 바꿔 쓰고 '혁명 정부'를 자처하며, 기존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들은 아Q 같은 부랑자는 혁명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며 그를 철저히 배제한다. 혁명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아Q는,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이자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오 나리의 집이 진짜 도적떼에게 습격당한다. 혁명당원이 되겠다며 설쳤던 아Q는 완벽한 희생양이 된다. 그는 졸지에 강도죄의 주범으로 몰려 관아로 끌려간다. 글을 모르는 그는 자신이 무엇에 서명하는지도 모른 채, 붓을 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라는 말에 열심히 원을 그린다. 수박씨처럼 삐뚤어진 원을 보며,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고 한탄하는 그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결국 그는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그는 자신을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을 본다.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총살은 참수보다 구경거리가 못 될 텐데'라는 실없는 걱정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허무하게 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싱거운 구경거리였다며 불평하며 흩어진다. 루쉰이 던진 세 가지 날카로운 질문 하나, '정신승리법'은 누구의 것인가? 아Q의 정신승리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어리석은 성격이 아니다. 루쉰은 이를 통해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연이어 패배하면서도, '중화사상'이라는 허울 속에 갇혀 자신들의 패배를 직시하지 못했던 당시 중국 전체의 정신 상태를 비판했다. 현실의 패배를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정신적인 자위를 하는 것으로는 결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통렬한 경고였다. 둘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아Q정전'은 신해혁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문학적 비판이다. 루쉰이 보기에, 신해혁명은 황제의 성을 바꾸고 깃발의 색깔을 바꿨을 뿐, 민중의 삶과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배층은 이름만 바꿔 기득권을 유지했고, 아Q와 같은 민중은 혁명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구경꾼으로 남거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셋째, 구경꾼은 죄가 없는가? 아Q를 괴롭히고, 그의 허세에 잠시 빌붙었다가, 그의 죽음을 무심하게 구경하는 웨이주앙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루쉰이 의학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도, 처형당하는 중국인을 동포들이 무감각하게 구경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고 나서였다. 그는 병든 개인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처럼 우매하고 냉담한 '군중'의 영혼을 깨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아Q의 비극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방관하고 즐긴 군중 모두의 비극인 셈이다. 10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아Q 정신' '아Q 정신'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국과 중국에서 공공연히 쓰인다.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실패를 정신적으로 포장하려는 태도를 비판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가 된 것이다. 100년 전 소설 속 인물이 이토록 생생한 현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때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우리가 원래 더 우월하다"는 식의 정신적 자부심에 기대어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려 하지는 않는가? '아Q정전'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자기기만으로 흐를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예방주사와도 같다. 우리 안의 '아Q'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아Q정전'은 유쾌한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읽는 내내 불편하고, 때로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키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위대한 고전은 우리에게 편안함이 아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루쉰은 100년 전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낡은 중국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아Q는 총살당했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허상 속으로 도피하려는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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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붉은 수수밭', 광활한 대지 위에서 피고 진 생명의 원초적 찬가
    2012년, 중국 국적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붉은 수수밭'이라는 다섯 글자가 따라붙는다. 이 작품은 그의 문학적 고향이자, 중국 민중의 원초적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땅 '가오미향'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장대한 서사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빚어낸 그의 대표작이다. '붉은 수수밭'은 점잖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와 논리를 거부하는 거칠고 관능적인 언어의 향연이며,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폭력과 저항이 광활한 수수밭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편의 원초적인 서사시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잘 닦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피와 땀과 고량주 냄새가 진동하는 대지 위를 맨몸으로 구르는 것과 같은 강렬한 문학적 체험이다. 신화가 된 가족의 역사 이 소설은 손자인 '나'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기억과 전설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재구성하는 독특한 비선형적 구조를 띤다. 역사는 명확한 연대기가 아닌, 신화처럼 뒤섞여 독자에게 전달된다. 1부: 나의 할머니, 다이펑롄 수수밭의 여신 이야기의 절대적인 중심은 '나'의 할머니 다이펑롄이다. 빼어난 미모와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당찬 성정의 소유자인 그녀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나병 환자인 양조장 아들 산볜랑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간다. 붉은 수수가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그녀가 탄 꽃가마가 흔들릴 때, 비극과 운명이 동시에 시작된다. 한 무리의 강도가 가마를 습격하고, 이때 가마꾼 중 한 명이었던 젊고 건장한 사내 위잔아오가 강도를 때려눕히며 그녀를 구해낸다. 짧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교감이 흐른다. 결혼 후 3일째 되던 날, 친정으로 향하던 다이펑롄은 수수밭 한가운데서 위잔아오와 다시 마주친다. 그는 그녀를 수수밭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가고, 그곳에서 폭력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다. '나'의 아버지 더우관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산볜랑이 의문사를 당하고, 젊은 과부가 된 다이펑롄은 양조장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그녀는 탁월한 수완으로 양조장을 이끌며 모두의 존경을 받는 여장부로 거듭난다. 2부: 나의 할아버지, 위잔아오 대지의 아들 '나'의 할아버지 위잔아오는 문명과 질서를 거부하는, 원초적 에너지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는 다이펑롄의 연인이자 아들의 아버지이지만, 한곳에 얽매이지 못하고 결국 전설적인 마적 두목이 된다. 그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이지만, 동시에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영웅이기도 하다. 할머니 다이펑롄이 '정착하는 대지'의 여신이라면, 할아버지 위잔아오는 '떠도는 바람'과 같은 존재로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3부: 피로 물든 붉은 수수밭 (항일전쟁) 소설의 후반부는 일본군의 침략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폭력 앞에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과정을 처절하게 그린다. 일본군은 양조장의 큰어른이었던 뤄한 아저씨를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죽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마적 두목이었던 위잔아오는 항일 게릴라 부대의 사령관으로 변모한다. 그는 아들 더우관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군 수송부대를 상대로 수수밭에서 매복 작전을 펼친다. 생명의 공간이었던 수수밭은 이제 처절한 격전지가 된다. 게릴라 부대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이고 가던 할머니 다이펑롄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에 맞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그녀의 선혈이 수수밭을 적시면서, 생명과 정열을 상징했던 수수의 붉은빛은 이제 저항과 희생의 피 색깔로 변모한다. 신화의 퇴색 세월이 흘러, '나'의 시대에 이르러 수수밭은 더 이상 과거의 야생성을 간직하지 못한다. 품종 개량된 수수는 키가 작고, 그 안에서 더 이상 신화적인 사랑이나 영웅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가 보여주었던 그 원초적인 생명력이 사라져버린 현대를 쓸쓸하게 관조하며 끝을 맺는다. 신화와 역사, 감각의 서사 모옌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 모옌의 문체는 흔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비견되지만, 그 뿌리는 중국의 민간 설화와 구전 전통에 더 깊이 닿아 있다. 그의 묘사는 지극히 감각적이다. 코를 찌르는 고량주의 냄새, 끈적한 피의 감촉, 살갗을 스치는 수수잎의 소리,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 등, 독자는 이성과 논리가 아닌 오감으로 이 이야기를 체험하게 된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 속에서 재창조되는 '신화'로 그려진다. 붉은 수수의 다층적 상징 이 소설에서 '붉은 수수'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선 주인공이다. 수수는 ‘①삶과 풍요(고량주의 원료), ②정열과 자유(인습을 벗어난 사랑의 공간), ③저항과 희생(항일 투쟁의 격전지이자 피로 물든 대지), ④그리고 역사 그 자체(모든 것을 지켜보는 증인)’를 상징한다. 수수밭의 흥망성쇠는 곧 가오미향 사람들의 운명과 직결된다. 국가가 아닌, 민중이 써 내려간 저항의 역사 '붉은 수수밭'이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항일전쟁이라는 거대 서사를 공산당이나 국민당 같은 공식적인 주체가 아닌, 마적과 양조장 여주인 같은 민중의 시각에서 그렸다는 점이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거세된 자리에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끈질기고 야생적인 생명력 자체임을 모옌은 웅변한다. 이는 국가가 독점해 온 역사 해석에 대한 문학의 강력한 대답이다. '한(恨)'의 서사와 '생명력'의 서사 1980년대, 중국 문단에는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딛고 민족의 뿌리를 찾으려는 '심근(寻根) 문학'의 경향이 나타났다. '붉은 수수밭'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한(恨)'의 정서로 풀어내고 민족의 비극을 노래했던 동시대 한국 문학의 흐름과 흥미로운 비교점을 제공한다. 한국의 서사가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수동적 저항의 측면이 강하다면, '붉은 수수밭'은 고난에 맞서 '폭발하고 분출하는' 능동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찬미한다. 두 나라가 식민주의와 전쟁이라는 비슷한 역사의 상처를 각기 다른 문학적 방식으로 승화시킨 과정을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학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체험 '붉은 수수밭'은 아름답거나 편안한 소설이 아니다. 폭력과 죽음, 원초적 욕망이 난무하는 혼돈의 세계다. 하지만 그 혼돈의 중심에는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에 대한 뜨거운 긍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동시에 위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정제된 역사 기록이 아닌, 땅과 피 냄새가 진동하는 '날것'의 서사를 통해 중국 민중의 원초적 생명력을 느끼고 싶은 독자,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각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분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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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1
  • '허삼관매혈기', 피를 팔아 시대를 건넌 한 남자의 눈물겨운 해학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소설을 읽는 것은, 거대한 쇄빙선이 얼어붙은 강을 깨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의 대표작 '인생'이 역사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또 다른 걸작 '허삼관매혈기'는 그 파도를 넘기 위해 제 몸의 피를 팔아야 했던 한 가장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심장을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만든다. '매혈(賣血)', 즉 피를 파는 행위. 이 섬뜩하고 비천하게 느껴지는 행위가, 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는 가족을 구원하는 가장 신성한 의식이자 유일한 수단이 된다. 작가 특유의 냉정한 시선과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유머, 즉 해학(諧謔)을 통해, '허삼관매혈기'는 지독한 비극을 가장 눈부신 가족애로 승화시킨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열한 번의 매혈, 한 편의 가족사 1부: 청년 허삼관, 피를 팔아 아내를 얻다 1950년대,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 허삼관이 제사공장에서 누에고치를 실크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마을 어른들로부터 "몸이 튼튼하다는 증거이자, 피를 팔고 난 뒤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데운 황주 두 냥을 마시는 것이 진짜 사내의 호사"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피를 팔고, 그 돈으로 호기롭게 돼지 간과 황주를 즐긴다. 이 '매혈 후 의식'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최고의 미녀이자 '꽈배기 서시'라 불리는 허옥란에게 반한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허삼관은 다시 한번 피를 판 돈으로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며 끈질기게 구애하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일락, 이락, 삼락 세 아들을 둔 가장이 된다. 2부: 피보다 진한 아버지의 이름 가정의 행복은 "큰아들 일락이 허삼관의 아들이 아니라, 허옥란의 옛 애인이었던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산산조각 난다. 일락의 얼굴이 하소용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온 동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수치심에 분노하며 일락을 모질게 대한다. "남의 자식을 위해 돈을 쓸 수 없다"며 일락만 빼고 다른 두 아들에게만 국수를 사주는 그의 모습은 옹졸하기 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일락이 싸움을 하다 상대방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고를 친다. 피해자 가족이 막대한 치료비를 요구하며 집에 쳐들어오자, 허삼관은 갈등에 휩싸인다. "내 아들도 아닌 놈을 위해 내 피를 팔 순 없다"고 소리치지만, 결국 그는 피를 팔아 치료비를 마련한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행한 매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 모르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되어간다. 3부: 위기의 순간마다 피를 파는 아버지 이후 허삼관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파도와 일상적인 위기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병원으로 가 피를 판다. 대기근의 시대에는 온 가족이 굶주림에 죽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몰래 피를 팔아 온 가족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국수 한 그릇씩을 사 먹인다. 문화대혁명의 시대에는 하방(下放) 운동으로 큰아들 일락이 시골 농촌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간염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 아들을 도시의 큰 병원으로 데려오기 위해, 허삼관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단기간에 여러 차례 피를 판다. 피를 너무 많이 판 나머지 길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하는 그의 여정은 처절하고 눈물겹다. 둘째 아들이 속한 생산대의 대장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아내 허옥란이 병에 걸렸을 때도, 집에 손님을 대접해야 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피를 팔아 위기를 넘긴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는, 가족의 생명수이자 위기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된다. 4부: 마지막 매혈, 그리고 눈물 세월이 흘러 시대는 안정을 찾고, 아들들은 모두 장성했으며, 가정 형편도 나아졌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피 파는 사람들을 본 허삼관은 문득 향수에 젖어 자신도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위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젊은 시절의 의식이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병원의 새로운 혈두(피를 관리하는 책임자)는 그의 나이 든 얼굴과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 "당신 피는 돼지 피나 다름없소. 아무도 사지 않소"라며 그를 모욕하고 쫓아낸다. 그 순간 허삼관은 무너져 내린다. 평생 가족을 구원했던 자신의 유일한 능력과 자부심의 원천이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서럽게 운다. "이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피를 팔 수가 없어. 나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야..."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세 아들과 아내 허옥란은 그를 찾아와, 자신들의 돈으로 그가 평생 먹고 싶어 했던 '볶은 돼지 간과 데운 황주'를 사준다. 이제는 아버지가 피를 팔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위로하면서. 허삼관은 가족의 위로 속에서,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비극을 희극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위화 작가 특유의 '해학' '허삼관매혈기'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이토록 비극적인 이야기를 놀랍도록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지독한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투고, 허풍을 떨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한다. 허삼관이 아내 허옥란과 벌이는 유치한 부부싸움, 피를 팔기 위해 물을 잔뜩 마셔 피의 양을 늘리려는 모습 등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러한 유머(해학)는 독자들이 비극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애정을 느끼게 만드는 탁월한 장치다. '피'의 다층적 상징 소설에서 '피'는 단순한 혈액이 아니다. 그것은 ①돈이자 생계 수단, ②남성성의 증명, ③가족을 구원하는 성수(聖水), ④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다. 특히 일락의 친자 논쟁을 통해, 작가는 '혈연(血緣)'이라는 생물학적 피보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흘리는 '희생의 피'가 더 고귀하고 진실된 것임을 역설한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 음식을 통한 구원과 위로 피를 판 대가는 언제나 '음식'으로 돌아온다. 볶은 돼지 간, 국수, 옥수수죽 등. 소설 속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위로'이자 '구원'이다. 대기근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먹는 국수 한 그릇의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물겨운 장면 중 하나다. 소시민 가장, 허삼관과 우리들의 아버지 한국의 문학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종종 과묵하고, 엄격하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허삼관은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옹졸하고 이기적인 소시민이다. 그는 국가나 이념을 위해 피를 팔지 않는다. 오직 내 가족의 배고픔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판다. 바로 이 지점이 허삼관이라는 인물에 전 세계 독자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그는 영웅이 아니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가족을 지켜내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영웅보다도 숭고하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가족의 가치가 중요해진 오늘날, 허삼관의 '가족 이기주의'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휴머니즘으로 다가온다. 세상 모든 아버지를 위한 찬가 '허삼관매혈기'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의 이야기를 가장 희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걸작이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허삼관의 어리석음에 웃다가, 그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고, 그의 숭고한 부성애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분, 지독한 비극 속에서도 피어나는 유머와 인간애의 힘을 믿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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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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