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10(금)

기획특집
Home >  기획특집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특집 기사

  • 스톡홀름 증후군, 적과의 동침인가 생존을 위한 비극적 유대인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무장 강도가 침입했다. 6일간 이어진 인질극이 끝났을 때, 세계는 충격적인 장면에 주목했다. 인질들이 경찰이 아닌 인질범을 두둔하고, 심지어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며 그들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 기이한 심리적 현상에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 극한의 공포 속에서 피어나는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비극적 유대는 오늘날 가정, 직장 등 다양한 사회 관계 속에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본 기획 기사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개념과 발생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세계를 놀라게 한 주요 사례들을 통해 그 실체를 파헤치며,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스톡홀름 증후군의 탄생: 노르말름스토리 은행 강도 사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197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Norrmalmstorg) 광장의 크레디트반켄(Kreditbanken) 은행에서 발생한 강도 인질 사건에서 유래했다. 범인 얀에리크 올손(Jan-Erik Olsson)은 은행 직원 4명을 인질로 잡고, 동료인 클라르크 올로프손(Clark Olofsson)의 석방과 거액의 현금을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6일간의 대치 기간 동안 인질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인질범들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 놓였다. 놀라운 일은 인질극이 끝난 후에 벌어졌다. 구출된 인질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엔마르크(Kristin Enmark)는 당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인질범들이 우리를 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를 보호해주었다. 나는 경찰이 더 두렵다"고 말하며 인질범들을 옹호했다. 다른 인질들 역시 석방 후 인질범들과 포옹을 나누고, 재판에서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 사건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 닐스 베예로트(Nils Bejerot)는 이러한 현상을 '노르말름스토리 증후군'이라 불렀고, 이는 곧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식적인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일종으로 분류되며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복합적인 심리 반응으로 이해된다. 2. 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끼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자 '생존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발생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생존에 대한 위협과 통제: 인질범은 인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인질은 생존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가해자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의 요구와 감정에 극도로 민감해진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되고 점차 동화된다. 외부로부터의 완벽한 고립: 인질극 상황에서 피해자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다. 유일하게 소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역설적으로 가해자뿐이다. 이러한 고립은 가해자의 관점과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해자가 베푸는 사소한 친절: 가해자가 물을 주거나, 화장실에 가게 해주거나, 잠시 밧줄을 풀어주는 등의 사소한 행동은 인질에게 큰 친절과 인간적인 배려로 왜곡되어 인식될 수 있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강력한 긍정적 감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믿음: 저항하거나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피해자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심리적 기제를 발동시킨다. 가해자와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게 된다. 이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외부의 구조 시도(경찰의 진압 등)를 오히려 자신과 가해자 모두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심리적 역전 현상을 보이게 된다. 3. 현실 속의 스톡홀름 증후군 스톡홀름 증후군은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들이 존재한다. 패티 허스트(Patty Hearst) 사건 (1974): 미국 언론 재벌의 손녀였던 패티 허스트는 급진 좌파 무장 단체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되었다. 그녀는 납치 두 달 후, 스스로를 '타니아'라 칭하며 납치범들과 함께 은행 강도에 가담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체포 후 재판에서 변호인단은 그녀가 스톡홀름 증후군을 겪었다고 변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타샤 캄푸쉬(Natascha Kampusch) 사건 (2006): 1998년, 10살의 나이로 등굣길에 납치된 오스트리아 소녀 나타샤 캄푸쉬는 8년 반 동안 작은 지하실에 감금되어 학대를 당했다. 2006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범인 볼프강 프리클로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는 내 삶의 일부였다"고 회고하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형성된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4. 사회적 함의: 인질 사건을 넘어 일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은 더 이상 인질극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 아동 학대, 데이트 폭력, 직장 내 괴롭힘, 광신적 종교 집단 등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관계 속에서 유사한 심리적 기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인 배우자를 떠나지 못하고 "그래도 저 사람이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라고 변호하거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한 자녀가 학대하는 부모를 감싸는 모습은 **'일상화된 스톡홀름 증후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폭력과 간헐적인 다정함이 반복되는 '학대의 순환' 구조는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하고, 가해자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비이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피해자들을 향해 "왜 벗어나지 못했는가?"라는 섣부른 비난을 던지기 전에, 그들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내면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깊은 트라우마의 신호이자 사회적 이해와 전문적인 치유가 필요한 영역이다. 결론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처절하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정신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고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증거다. 이는 우리에게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욱 신중하게 경청하고, 그들의 상처를 섣불리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거운 사회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10-06
  • 21C 미국을 배회하는 매카시즘의 유령, 1950년대 냉전의 광풍
    1950년대 초, 미국 사회를 휩쓴 '붉은 공포(Red Scare)'의 광풍, 매카시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입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마녀사냥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미국 민주주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왜 다시 매카시즘의 망령을 소환해야 하는가? 오늘날의 분열과 불신의 정치 지형 속에서 매카시즘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그 비판적 교훈을 되짚어 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 회고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1. 매카시즘의 탄생: 냉전의 공포가 낳은 괴물 매카시즘(McCarthyism)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던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열풍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당시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의 한 여성 공화당원 클럽 연설에서 매카시는 "나는 오늘 국무장관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정책을 만들고 있는 공산당원 205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 폭탄선언은 즉각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비록 그가 제시한 명단의 실체는 끝내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의 발언은 이미 팽배해 있던 대중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등 연이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매카시는 '내부의 적'을 색출하겠다는 선동적인 구호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순식간에 정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주장은 사실 확인보다는 의심과 공포를 기반으로 했으며, 언론은 그의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중계하며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2. 광기의 시대: 마녀사냥의 방식과 그 희생자들 매카시즘의 광풍은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위원회는 정부, 학계, 예술계, 노동계 등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소환하여 그들의 사상과 충성심을 검증했다. 청문회는 피고발인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명확한 증거 없이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소환된 이들은 동료나 친구의 이름을 거론하도록 강요받았다. 증언을 거부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은 '비협조적인 증인'으로 분류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 공무원들이 직장을 잃고 사회적 명예를 실추당했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계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 중 하나였다.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 배우 게리 쿠퍼 등 많은 영화인이 청문회에 불려 나왔으며, '할리우드 텐(Hollywood Ten)'으로 불리는 10명의 영화인은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회 모독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역시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려 사실상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이러한 '블랙리스트(Blacklist)'는 영화계를 넘어 학계, 언론계, 노동계로 확산되며 미국 사회 전체의 지적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었고, 사회는 서로를 감시하고 불신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3. 매카시즘의 몰락과 그 교훈 영원할 것 같던 매카시의 권력은 195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무분별한 폭로전이 군부로까지 향하면서 대중의 여론이 돌아선 것이다. 특히 육군과의 공방을 다룬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면서, 증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윽박지르는 그의 모습이 전국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는 그의 권위와 신뢰에 치명타를 입혔다. 당시 육군 측 변호사였던 조지프 웰치가 매카시를 향해 던진 "상원의원, 당신에게는 일말의 품위도 없습니까?(Have you no sense of decency, sir, at long last?)"라는 일갈은 시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외침이 되었다. 결국 그해 12월, 미 상원은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그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매카시즘은 미국 사회에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또한, 근거 없는 비방과 선동이 사회를 얼마나 극심한 분열과 불신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비판적 사고와 건전한 토론이 실종된 사회,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적으로 규정하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4. 21세기에 트럼프의 이름으로 부활한 유령 매카시즘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있지 않다. 그 유령은 21세기 미국 정치,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집권과 그 이후의 정치 현상인 '트럼피즘(Trumpism)'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많은 역사학자와 정치 분석가들은 트럼프의 정치 스타일과 매카시의 수법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선동 방식이다. 매카시가 '정부 내 공산주의자'라는 보이지 않는 적을 설정했다면, 트럼프는 '가짜뉴스 언론', '딥 스테이트(Deep State, 숨은 권력 집단)', '불법 이민자' 등을 적으로 규정하고 지지층의 불안과 분노를 자극했다. 근거가 부족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의심을 사실처럼 둔갑시키는 모습은 매카시의 수법과 판박이다. 둘째, 충성심을 강요하고 반대자를 적으로 돌리는 행태다. 매카시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들을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세웠다. 트럼프 역시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인을 '국민의 적'으로 칭하고, 당내 반대파를 '이름만 공화당원(RINO, Republican In Name Only)'이라 비난하며 개인에 대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건전한 정책 토론 대신, '우리 편'과 '적'을 가르는 이분법적 진영 논리를 강화시켰다. 셋째, '마녀사냥(Witch Hunt)'이라는 용어의 역설적 사용이다. 본래 매카시즘의 부당한 탄압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던 '마녀사냥'이라는 용어를, 트럼프는 자신을 향한 모든 의혹과 수사(러시아 스캔들 특검, 탄핵 조사 등)를 방어하는 수사(修辭)로 전용했다. 이는 자신을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로 포장하고, 사법 시스템과 언론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흥미로운 역사적 연결고리는 매카시의 악명 높은 수석 변호사였던 **로이 콘(Roy Cohn)**이 젊은 시절 트럼프의 멘토이자 변호사였다는 점이다.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마라, 비난받으면 두 배로 되갚아주라"는 식의 로이 콘의 공격적인 전술은 트럼프의 정치 여정 내내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론적으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매카시즘의 단순한 반복을 넘어, 소셜미디어라는 강력한 확산 도구를 통해 더욱 교묘하고 파급력 있게 진화한 '신(新)매카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공포를 이용한 정치, 진실을 경시하는 태도, 그리고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은 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 민주주의를 다시금 위협하고 있다. 매카시즘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5. 21세기에 되살아난 매카시즘 매카시즘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고, 이념적 잣대로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행태는 '현대판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가짜뉴스를 순식간에 확산시키며 새로운 형태의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반사회적' 혹은 '비애국적'으로 낙인찍고, 합리적인 토론 대신 감정적인 비난을 앞세우는 모습은 매카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결론적으로, 매카시즘의 역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공포'를 이용한 정치, 그리고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intolerance(불관용)이다. 건전한 비판과 상호 존중의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에 기반한 냉철한 판단력이야말로 매카시즘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10-06
  • 쿨리지 효과.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이유?
    우리는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갈망하기도 해. 특히 이성 관계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늘 옆에 있던 연인보다 새로운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혹시 있지 않아? 바로 이 현상을 설명해 주는 심리학적 개념이 있어. 오늘 알아볼 쿨리지 효과야. 쿨리지 효과는 성적으로 왕성한 동물 수컷이 새로운 암컷이 나타났을 때, 기존의 암컷에 대한 흥미를 잃고 새로운 암컷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말해. 이 현상의 이름은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의 일화에서 유래했어. 어느 날 쿨리지 대통령 부부가 한 닭 농장을 방문했어. 부인이 농장 주인에게 "이 수탉 한 마리가 이렇게 많은 암탉을 상대하나요?" 하고 물었지. 주인은 "예,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미를 합니다"라고 답했어. 그러자 부인은 농담 삼아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려주세요"라고 말했어. 이야기를 들은 쿨리지 대통령은 주인에게 물었어. "그런데 그 수탉이 매번 같은 암탉과 하나요?" 주인은 "아닙니다. 매번 새로운 암탉과 합니다"라고 답했지. 쿨리지 대통령은 웃으며 "이 사실은 제 아내에게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해. 이 일화처럼, 쿨리지 효과는 새로운 상대가 나타났을 때 성적 흥미가 다시 활성화되는 현상을 의미해. 쿨리지 효과는 왜 나타날까? 쿨리지 효과는 단순히 인간의 바람기를 합리화하는 개념이 아니야. 이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다양한 암컷과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암컷을 만났을 때 흥미가 다시 커지는 것은 이러한 번식 본능과 관련이 있지. 뇌과학적으로 보면, 새로운 상대를 만났을 때 뇌에서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이 대량으로 분비되면서 강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게 돼. 쿨리지 효과는 비단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야. 쥐, 양, 원숭이 등 다양한 동물 실험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어. 결국 이 효과는 새로운 자극을 통해 번식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일부라고 볼 수 있어. 물론 인간은 이성적 판단과 사회적 규범에 따라 이러한 본능을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내면에 이런 생물학적 본능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09-03
  • 죄수의 딜레마, 배신이냐, 침묵이냐?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인 선택이 모여, 결국 모두에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아이러니한 상황. 우리는 왜 그룹 과제에서 무임승차를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며 씁쓸해할까? 이러한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론이 있다. 바로 게임 이론의 가장 유명한 모델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다. 1. 두 명의 죄수, 그리고 운명의 선택 '죄수의 딜레마'는 1950년 미국의 랜드 연구소(RAND Corporation) 소속이던 수학자 메릴 플러드(Merrill Flood)와 멜빈 드레셔(Melvin Dresher)가 고안하고, 지도교수였던 앨버트 터커(Albert W. Tucker)가 '죄수'라는 비유를 들어 각색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범죄 조직의 두 공범(A와 B)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두 사람의 자백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검사는 둘을 분리된 취조실에 가두고, 서로 소통할 수 없게 한 뒤 각각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만약 당신은 침묵(동료와 협력)하고, 동료가 당신을 배신(자백)하면: 당신은 10년형, 동료는 석방된다. 만약 당신은 자백(동료를 배신)하고, 동료가 침묵(협력)하면: 당신은 석방, 동료는 10년형을 받는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자백(서로 배신)하면: 두 사람 모두 5년형을 받는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침묵(서로 협력)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둘 다 1년형만 받는다. 2.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최악의 결과로 당신이 죄수 A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경우의 수를 따져보자. '만약 동료 B가 침묵(협력)한다면?' 내가 침묵하면 1년형을 받는다. 내가 자백하면 석방된다. 따라서 자백하는 것이 이득이다. '만약 동료 B가 자백(배신)한다면?' 내가 침묵하면 10년형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내가 자백하면 5년형을 받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자백하는 것이 이득이다. 결론적으로, 동료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에게는 '자백(배신)'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 즉 '우월 전략(Dominant Strategy)'이 된다. 문제는 상대방인 죄수 B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점이다. 그 역시 동료(A)의 선택과 무관하게 자백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 결과, 두 죄수는 모두 '합리적'으로 서로를 배신하는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나란히 5년형을 선고받는다. 둘 다 침묵을 지켜 1년만 복역할 수 있었던 '집단 최선의 결과'를 스스로 걷어차고 '집단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합리성이 집단의 비합리성으로 귀결되는 딜레마가 바로 이 이론의 핵심이다. 3. 딜레마는 교도소 담장 안에만 있지 않다 이 딜레마는 단순히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 세계의 수많은 문제들이 죄수의 딜레마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업 간의 가격 경쟁: 두 경쟁사가 있다. 둘 다 높은 가격을 유지하면(협력)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한쪽이 가격을 내려(배신) 고객을 독점하려 하면, 다른 쪽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결국 끝없는 '치킨 게임'으로 번져 두 기업 모두 수익성이 악화되는(둘 다 5년형) 결과로 이어진다. 국가 간의 군비 경쟁: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상황이 대표적이다. 양국 모두 군축에 합의하면(협력) 막대한 국방비를 절약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몰래 군비를 증강할(배신) 가능성을 우려해, 양국 모두 경쟁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력을 키우는(둘 다 배신) 길을 택했다. 이는 인류 전체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는 비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환경 문제: 모든 국가가 탄소 배출을 줄이면(협력)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국가가 자국의 경제 성장을 위해 배출량을 유지하거나 늘리면(배신), 다른 국가들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협력의 대열에서 이탈할 유인이 생긴다. 결국 모두가 기후 변화의 피해자가 되는 공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 그렇다면 딜레마를 탈출할 방법은 없는가?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 사회의 비관적인 측면을 보여주지만, 학자들은 이 딜레마를 극복할 몇 가지 조건 또한 제시한다. 반복되는 게임 (Repeated Game):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맺고 게임을 해야 한다면 '협력'의 가능성이 커진다. 이번에 내가 상대를 배신하면, 다음번에 상대가 반드시 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계에서는 '신뢰'와 '평판'이 중요한 자산이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상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팃포탯(Tit-for-Tat)' 전략이 효과적인 이유다. 소통과 신뢰 (Communication & Trust): 딜레마의 근본 원인은 서로 소통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만약 죄수들이 사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침묵하자"고 굳게 약속하고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면, 최상의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도 투명한 소통과 약속은 배신의 유인을 줄이는 핵심 요소다. 강력한 제3자의 개입 (Third-Party Enforcement): 배신자를 처벌하고 협력의 규칙을 강제하는 외부의 힘이 있다면 딜레마는 쉽게 해결된다. 기업들의 가격 담합을 금지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국가 간의 약속을 감시하는 '국제기구'나 '국제법' 등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5.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가치 죄수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개인의 합리성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서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일수록, 구성원 모두가 손해를 보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결국 이 딜레마를 푸는 열쇠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에 있다.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배신보다 장기적인 협력을 가치 있게 여기고, 소통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며, 규칙을 지키려는 노력이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에서 벗어나 '모두가 승리하는 게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09-03
  • 믿음이 현실을 만든다? 피그말리온과 플라시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단순한 자기계발서의 문구가 아니다. 심리학과 의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믿음'과 '기대'가 인간의 행동과 신체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다. 두 효과 모두 긍정적 기대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그 작동 원리와 조건에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1. 피그말리온 효과란 무엇인가? - 긍정적 기대의 나비효과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했다. 키프로스의 왕이자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진다. 그의 간절한 사랑에 감동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피그말리온은 살아 움직이는 갈라테이아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신화처럼, 타인의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실제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과 결과를 이끌어내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른다.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한 형태로, 교육학 및 조직 심리학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1968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 교수와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레노어 제이컵슨(Lenore Jacobson)의 유명한 실험을 통해서다. 연구팀은 한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학생 20%를 선발한 뒤, 교사에게 "이 학생들은 지능과 학업 성취 잠재력이 매우 높은 학생들"이라는 거짓 정보를 전달했다. 8개월 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명단에 포함된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실제로 성적이 큰 폭으로 향상되었던 것이다. 교사들은 잠재력이 높다고 '믿었던' 학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냈고, 더 높은 수준의 질문을 던졌으며, 더 많은 칭찬과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긍정적 상호작용이 학생들의 자신감과 학습 동기를 자극했고, 결국 뛰어난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타인(교사)의 기대가 대상(학생)에게 전달되어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 사회적·관계적 메커니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2. 플라시보 효과란 무엇인가? - '가짜 약'의 놀라운 힘 플라시보 효과는 의학 분야에서 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아무런 약효 성분이 없는 가짜 약(僞藥, placebo)을 진짜 약이라고 믿고 복용했을 때, 실제로 환자의 증상이 완화되거나 치료되는 효과를 말한다. 라틴어로 '마음에 들도록 하다'라는 뜻을 가진 'placebo'에서 유래했다. 예를 들어, 두통 환자에게 비타민이나 설탕으로 만든 알약을 진통제라고 속여서 투여하면, 상당수의 환자가 실제로 통증이 가라앉는다고 느낀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착각을 넘어, 뇌에서 통증을 억제하는 엔도르핀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실제로 분비되는 등 신체적 변화를 동반한다. 플라시보 효과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믿음과 기대다. "이 약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환자 스스로의 강력한 믿음이 뇌의 특정 부위를 활성화시켜 신체에 실질적인 치유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약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에서는 플라시보 효과를 통제하기 위해, 진짜 약을 투여하는 그룹과 가짜 약을 투여하는 그룹을 비교하여 약의 실제 효능을 검증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친다. 이는 플라시보가 개인의 내면적 믿음이 신체 생리 작용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생물학적 메커니즘임을 시사한다. 3. 공통점: '기대'와 '믿음'이라는 강력한 엔진 피그말리온 효과와 플라시보 효과의 가장 큰 공통점은 '긍정적 기대'와 '믿음'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나의 잠재력을 깨운다. 플라시보 효과: 나 스스로가 약(혹은 치료법)에 거는 '믿음'이 나의 몸을 치유한다. 두 현상 모두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결국 "그렇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속성을 공유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요인이 측정 가능한 현실의 변화(성적 향상, 증상 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마음의 힘'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 할 수 있다. 4. 결정적 차이점: 기대의 '주체'와 '대상'은 다르다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두 효과는 그 힘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를 향하는지에서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기대의 방향성'**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외부에서 내부로' 향한다. 즉, 타인의 기대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인(對人) 관계적' 현상이다. 반면, 플라시보 효과는 '내부에서 신체로' 향한다. 즉, 자기 자신의 믿음이 자신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자기(自己) 지향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 슬럼프에 빠진 운동선수에게 감독이 "나는 너의 잠재력을 믿는다. 넌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하여 선수가 실제로 기량을 회복했다면 이는 피그말리온 효과다. 하지만 그 선수가 "이 목걸이를 하면 힘이 솟는다"고 굳게 믿고 경기장에 나섰을 때 실제로 더 나은 성과를 냈다면, 이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로 볼 수 있다. 결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피그말리온 효과와 플라시보 효과는 단순한 심리학 용어를 넘어, 우리의 일상과 관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를 제공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우리에게 타인을 향한 긍정적 시선과 따뜻한 격려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팀을 이끄는 리더라면, 자신의 기대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항상 기억해야 한다. 불신과 비난 대신 믿음과 지지를 보낼 때, 상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우리에게 타인을 향한 긍정적 시선과 따뜻한 격려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팀을 이끄는 리더라면, 자신의 기대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항상 기억해야 한다. 불신과 비난 대신 믿음과 지지를 보낼 때, 상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는 우리 자신을 향한 긍정적 믿음의 힘을 말해준다.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을 때 "나는 할 수 있다"고 믿는 자기 확신, 몸이 아플 때 "곧 나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실제로 우리의 뇌와 신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결국 두 효과는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믿음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하나의 진실로 모인다. 타인을 향한 따뜻한 기대를 품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심리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더 나은 나 자신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일 것이다.
    • 기획특집
    • 상식지식
    2025-09-02
  • '차이리(彩礼)', 중국 청년들을 결혼 앞에서 울리는 '하늘 높은' 신붓값
    "차와 집은 기본이고, 차이리(彩礼) 18만 8천 위안(약 3,500만 원), 그리고 '삼금(三金)'까지… 아들 장가보내려다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게 생겼습니다." 최근 중국의 한 농촌 지역에 사는 50대 부모가 언론에 토로한 한탄이다. 아들의 결혼을 위해 평생 모은 돈을 털고도 모자라 '차이리 대출'까지 알아보고 있다는 이들의 이야기는, 비단 이 가족만의 특별한 사연이 아니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는 '차이리'라 불리는 결혼 지참금 관습이 수많은 청년과 그 부모들을 깊은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본래 신부를 키워준 처가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아름다운 전통이, 이제는 결혼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자 사회적 문제로 변질된 것이다. 오늘일보에서는 중국 청년들의 가장 큰 현실적 고민이 된 차이리 현상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 사회의 명암을 들여다본다. 차이리의 역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랑 측이 신부 측에 비단, 가축, 예물 등을 보내 정혼의 신표로 삼고, 귀한 딸을 내어주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이는 신랑의 경제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딸이 시집가서 고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즉, 그 시작은 '거래'가 아닌 '정성과 예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차이리의 의미는 완전히 변질되었다. 특히 일부 농촌 지역과 중소 도시를 중심으로 차이리 액수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하늘 높은 가격의 차이리'라는 뜻의 '톈자차이리(天价彩礼)'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지역에 따라 편차는 크지만, 허난성, 장시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돈으로 1억 원에 달하는 차이리를 요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평균적으로 작게는 3천만원부터 많겠는 4억원까지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도시의 아파트, 자동차, 그리고 '삼금(三金)'이라 불리는 금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세트는 별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혼 한 번에 30년 가난이 시작된다(婚一次, 穷三十年)"는 자조 섞인 말이 유행할 정도다. 아름다운 전통이 어떻게 젊은 세대를 짓누르는 괴물이 되었을까?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지목한다. 첫 번째는 심각한 성비 불균형이다. 1979년부터 30년 넘게 이어진 '한 자녀 정책'과 남아선호사상이 결합하면서,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남초 현상이 심각한 나라가 되었다. 현재 중국의 미혼 남성은 미혼 여성보다 약 3,000만 명 이상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 신붓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신부 측의 협상력을 극단적으로 높여 차이리 액수를 끌어올리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 특유의 '체면(面子, 몐쯔) 문화'와 과시적 소비 풍조다. "내 딸이 남의 딸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신부 측 부모의 체면과, "이 정도는 해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신랑 측의 체면이 맞물리면서 차이리 경쟁에 불이 붙었다. 여기에 SNS의 발달로 남들의 결혼 준비 과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비교 심리'가 더해져 차이리의 인플레이션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랑보다 돈? 결혼을 막는 사회 문제로 과도한 차이리는 수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낳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청년들이 결혼 자체를 기피하거나 포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천문학적인 차이리를 감당할 수 없어 결혼을 미루거나 결국 헤어지는 커플들이 속출하고 있다. 결혼 과정이 신랑 측과 신부 측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차이리 액수를 흥정하는 과정에서 양가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되어 결국 파혼에 이르고, 결혼 후에도 시댁이 무리해서 마련한 차이리 때문에 부부 관계가 삐걱거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결혼은 사랑이 아닌 조건과 돈의 결합'이라는 냉소적인 인식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중앙정부는 수년 전부터 '결혼 풍속 개혁'을 외치며 과도한 차이리와 사치스러운 결혼 문화를 '사회적 병폐'로 규정하고, 각 지방 정부에 이를 개선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일부 지방에서는 '차이리 상한액'을 권고하거나, 간소한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에게 보조금을 주는 등의 정책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수천 년간 이어진 관습이자, 지극히 사적인 가족 간의 약속을 정부가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실효성은 미미하다는 비판이 많다. 중국의 차이리 문제는 비단 강 건너 불구경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예물과 예단, 집 장만 문제 등 결혼을 둘러싼 경제적 부담과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혼이 당사자들의 사랑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모 세대의 경제력과 체면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차이리 현상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사회가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욕망 사이에서 어떤 혼란을 겪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가족을 중시하는 전통이, 체면과 과시욕이라는 현대적 욕망과 만나 기형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얼마짜리' 차이리가 오갔는지가 한 사람의 가치를 대변하는 척도가 되어버린 현실. 이는 우리에게 '결혼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고 있다.
    • 기획특집
    • 세상만사
    2025-09-01
  • 이념의 장벽 '북방정책'의 화룡점정, 한중수교
    한중수교는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이후 30여 년간 동북아 정세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외교 혁명'이었습니다. 1992년 8월 24일 오전 10시, 중국 베이징의 조어대(釣魚台) 국빈관. 대한민국의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첸지천(錢其琛)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굳은 악수를 나눴다. TV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된 이 짧은 순간은, 40여 년간 이어진 동북아 냉전 체제의 견고한 벽이 무너져 내리는 극적인 장면이었다. 불과 42년 전, 한반도에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적국'이 모든 이념의 장벽을 넘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다.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가장 찬란한 성공으로 기록된 한중수교. 그러나 이 역사적인 악수의 이면에는 오랜 동맹이었던 대만과의 가슴 아픈 단교, 혈맹 북한의 거센 반발, 그리고 양국 외교관들이 펼쳤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비밀 협상이 숨어 있었다. 제1부: 얼어붙은 장벽, "죽의 장막" 너머의 두 나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 관계였다. 우리는 중국을 '중공(中共)'이라 부르며 공산주의 팽창의 선봉으로 여겼고, 중국은 우리를 '남조선'이라 칭하며 미 제국주의의 괴뢰 정권으로 간주했다. 서울에는 중화민국, 즉 대만의 대사관이 있었고, 양국은 반공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끈끈한 우방 관계를 유지했다. '죽의 장막' 너머의 두 나라는 수십 년간 어떠한 공식적인 교류도 없이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만을 쌓아갔다. 이 얼어붙은 관계에 첫 균열이 생긴 것은 1983년 5월,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중국 민항기가 공중 납치되어 춘천의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것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중국 민항총국장이 공식 직함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고, 대한민국 외무부와 중국 정부 대표단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하며 9일간의 협상을 벌였다. 비록 외교적 해프닝이었지만, 이는 양국 정부가 서로를 실체로 인정한 최초의 공식 접촉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제2부: 실리의 바람이 불다 - 노태우의 북방정책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냉전의 벽을 허무는 기폭제가 되었다. '화합과 전진'을 내세운 올림픽에는 중국, 소련을 비롯한 대다수의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는 이념을 넘어 실리를 추구하는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서독이 '동방정책'으로 동독 및 동구권과 교류하며 통일의 기반을 닦았듯, 우리도 북한의 오랜 동맹인 중국, 소련과 관계를 개선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새로운 경제 영토를 개척하자는 대담한 구상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필요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걷던 중국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경제 발전 경험은 중국에게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의 조건이었다. 1991년, 양국은 무역대표부를 상호 설치하며 사실상의 대사관 업무를 시작했다. 이념의 시대가 가고, 국익과 경제가 외교의 최우선 순위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3부: 첩보전을 방불케 한 비밀 협상 본격적인 수교 협상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단연 '대만 문제'였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했다. 오랜 우방을 우리 손으로 내쳐야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당시 정부는 대만과의 관계를 고려해 '선 수교, 후 단교'를 희망했지만, 중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우리 정부는 대만 측에 수교 발표 불과 24시간 전에 단교 방침을 통보하는, 외교적으로는 비정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리덩후이 당시 대만 총통은 "한국은 신의 없는 나라"라며 격분했고, 타이베이의 한국 대사관 앞에서는 연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또 다른 난관은 '북한 문제'였다. 수십 년간 '순치보거(脣齒輔車, 입술과 이, 수레와 바퀴처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북한을 설득하는 것은 중국의 몫이었다. 첸지천 외교부장은 수교 발표 직전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도 국익을 위해 남조선과 수교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김일성은 "배신행위"라며 격노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한은 이후 한동안 중국을 향해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깊은 배신감을 드러냈다. 제4부 결론: 동반자인가, 경쟁자인가? 30년의 동상이몽(同床異夢) 1992년의 역사적인 악수 이후, 한중 관계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수교 당시 6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교역액은 30년 만에 3,600억 달러를 돌파하며 50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고, '한류(韓流)'는 중국 대륙을 휩쓸며 양국 국민의 마음을 가깝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의 여정이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드(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보복,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문제, 그리고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양국 관계가 더 이상 '상호보완적'이 아닌 '경쟁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때 같아 보였던 양국의 꿈은 이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동상이몽'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의 결단이 20세기 말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중수교는 이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국익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릴 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생생한 증거다. 파트너이자 경쟁자로서 복잡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오늘, 30여 년 전 냉전의 벽을 넘었던 그 지혜와 용기가 다시 한번 필요한 시점이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 조선의 3일 천하를 짓밟은 야심가 위안스카이
    갑신정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실패이자,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단순한 국내 정변을 넘어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한중일 삼국의 각축전이라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884년 12월 4일, 한성(서울)의 밤은 근대의 불빛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신식 우편제도를 관장할 '우정총국'의 개국 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서양식 연회복을 입은 외교관들과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어울린 이 화려한 연회는, 그러나 곧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으로 돌변한다. 김옥균을 필두로 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혁명은 단 3일 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3일 천하'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 그는 조선의 개혁가가 아닌 스물다섯 살의 야심에 찬 청나라 군인,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이것은 좌절된 혁명의 기록이자, 한 개인의 결단이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제국의 향방을 결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 "오늘 밤, 거사를 일으킵시다!" - 불타는 우정총국 1880년대 초반의 조선은 폭풍전야였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개항 압력 속에서, 나라는 두 개의 길을 두고 갈등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자는 민씨 척족 중심의 '사대당(수구파)'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자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독립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더욱 첨예해졌다.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모두 한성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특히 청나라는 3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선봉에 선 인물이 바로 위안스카이였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가 베트남을 둘러싼 '청프전쟁'에 발이 묶여 조선에 주둔하던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키자, 이들은 '바로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로부터 "일본군 150명이 당신들을 돕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이들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의 신호탄으로 삼았다. 연회장 밖에서 피어오른 불길을 신호로, 개화파 행동대원들은 수구파 핵심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급히 궁으로 달려가 고종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제2부: 짧았던 혁명의 꿈, 14개조 개혁안 고종의 신변을 확보한 개화파는 즉시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자신들의 꿈이 담긴 '14개조 개혁 정강'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혁명적이었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한다(제1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운다(제2조),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한다(제4조)..." 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근대적인 재정 및 행정 시스템을 갖춘 완전한 독립 국가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근대 국민 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순간이었다. 일본 공사관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과 개화파 내각. 그들의 혁명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안한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한성 내에는 여전히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남아있었고, 그들의 지휘관 위안스카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수구파 세력은 위안스카이에게 달려가 "개화당과 일본이 왕을 납치했으니 구원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제 모든 것은 스물다섯 청년 장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제3부: 야심가의 결단, "조선을 구원하라" 위안스카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조선의 정변 소식을 듣고 즉시 본국에 전보를 쳤지만, 답신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외교적 관례상 타국의 궁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만약 이 정변이 성공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이 들어선다면, 청나라가 수백 년간 누려온 종주권은 물거품이 되고 동아시아의 판도는 일본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왕이 위험에 처했으니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휘하의 청군 1,500명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했다. 이는 개화파를 호위하던 일본군 150명의 10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이었다. 12월 6일 오후,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궁궐 담을 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결과는 명백했다. 중과부적이었던 일본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공사관으로 퇴각했고, 개화파 지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탈출했지만, 홍영식, 박영교 등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참살당했다. 우정총국의 불꽃으로 시작된 혁명은, 위안스카이의 총칼 아래 단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제4부 결론: 실패한 혁명, 그러나 역사는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더욱 깊은 청나라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위안스카이는 정변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어, 이후 10년간 조선의 왕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행세했다. 이 사건은 그의 정치적 야망에 날개를 달아준 첫 번째 무대였으며, 훗날 그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대총통의 자리에 오르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갑신정변은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낡은 질서에 맞서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세우려 했던 최초의 정치 혁명이었으며, 그들이 내걸었던 14개조 개혁안은 이후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3일 천하를 짓밟은 위안스카이의 총성은 모든 것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본격적인 대결, 즉 10년 뒤 발발할 청일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은 그렇게 또 다른 역사의 문을 열고 있었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 열하일기, 250년 전 한 선비의 뜨거운 중국 리포트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연암(燕巖)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선 위대한 지식인의 고뇌와 성찰이 담긴 역작이다.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250년 전 한 선비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본다. 1780년 조선. 나라는 성리학이라는 단단한 이념의 성벽 안에 갇혀 있었다.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의 나라'라 멸시하며,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 믿었다. '북벌(北伐)'의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청나라를 배우자는 주장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不敬)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바로 그해 여름,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났으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는 5개월간의 여정에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담아,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한 권의 '현장 리포트'를 써 내려갔다.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편견을 깨고 실용을 외친 한 위대한 지식인의 혁명적 제안서였다. 제1부: 편견의 땅에서 미지의 땅으로 박지원이 여행을 떠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소중화(小中華)', 즉 작은 중국이라는 자부심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 멸망하자, 이제 중화문명의 정통성은 오직 조선에만 남았다는 선민의식이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 수도 연경(북경)을 방문하는 사신단의 마음은 복잡했다.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오랑캐'의 땅을 밟는다는 치욕과 경멸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은 달랐다. 그는 44세가 되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등 젊은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익혔다. 그에게 이번 여정은 마지못해 떠나는 길이 아니라, 조선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 벌판을 지나 연경에 도착한 뒤,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 현재의 청더시)까지 향하는 1천여 킬로미터의 대장정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눈은 궁궐의 화려함이 아닌, 청나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 담긴 실용의 지혜를 향하고 있었다. 제2부: 벽돌 한 장, 수레 하나에 담긴 충격 '열하일기'가 위대한 이유는 거대한 담론이 아닌, 아주 작은 관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받은 첫 번째 충격은 바로 '벽돌'이었다. 흙과 짚으로 집을 짓고 나무로 다리를 놓던 조선과 달리, 청나라는 집도, 성벽도, 다리도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그는 벽돌이 운반과 보관이 쉽고, 견고하며, 제작 기술만 보급되면 어디서든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건축 자재임을 간파했다. 그는 조선이 쓸데없는 명분에 사로잡혀 실용을 놓치고 있음을 통탄했다. 두 번째 충격은 '수레'였다. 청나라의 넓은 길 위로는 수많은 수레가 쉴 새 없이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잘 닦인 도로망과 규격화된 수레가 유통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의 수레는 좁은 길 때문에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바퀴의 폭마저 제각각이라 효율이 떨어졌다. 박지원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는 나라는 망할 것이다"라고 단언하며, 유통과 상업을 천시하는 조선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단순히 보고 감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직접 청나라 학자, 상인, 농민들과 필담을 나누며 그들의 개방적인 사고방식과 실용적인 지식에 감탄했다. 그에게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반드시 배워야 할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갖춘 나라였다. 이 모든 깨달음이 실학사상의 핵심인 '이용후생(利用厚生, 도구를 편리하게 사용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으로 집약되었다. 제3부: "법고창신", 열하에서 조선의 미래를 보다 열하에서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에 던질 메시지를 정리했다. 그것이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되, 그것을 변화시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옛것(古)'은 맹목적인 명나라 숭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나라의 발전된 현실 그 자체가 조선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古)'였다. 그는 청나라의 벽돌, 수레, 시장, 화폐 시스템 등 실용적인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랑캐에게 배울 것은 없다"는 조선 지배층의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당연히 그의 주장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는 박지원의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고 저속하다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그의 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그의 파격적인 생각과 표현 방식이 조선의 전통적 질서를 흔들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는 금서(禁書)처럼 취급받으며 한동안 양지에서 논의될 수 없었다. 제4부 결론: 250년 전의 질문,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당대에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열하일기'는 암암리에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며 실학사상의 '교과서'가 되었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후대의 개혁 사상가들은 '열하일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떴다. 박지원은 조선 최초의 '중국 통신원'으로서, 편견 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자국 사회에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는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250년이 지난 오늘날, '열하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익숙한 편견과 낡은 명분에 사로잡혀,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가치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박지원의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추구하라"는 외침은 여전히 유효한, 아니 어쩌면 더욱 절실한 화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 별 헤는 밤...북간도의 고뇌,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을 이 문장은, 단순한 시구를 넘어 한 시대의 양심과 순결한 영혼의 무게를 담고 있다. 시인 윤동주. 그는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시는 암흑의 시대를 건너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의미를 묻는다.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된 고향,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언덕과 강, 별과 십자가의 실제 무대였던 곳. 바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북간도(北間島)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우리말과 민족 교육의 불꽃을 지폈던 그 땅, 용정(龍井)으로 떠나 시인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제1부: 용정(龍井), 시인의 고향을 걷다 두만강 너머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터를 잡은 디아스포라의 땅, 북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과거 지명 간도)은 윤동주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현재는 '룽징(龙井)'이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내 중심에 있는 한 우물에서 유래했다. 과거 이 우물가에서 두 명의 조선인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고을 원님이 감탄하여 우물에 '용정(龍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일찍부터 배움과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짐작게 한다. 윤동주는 이 용정에서도 '동방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외조부이자 민족 교육자였던 김약연이 세운 이 마을은, 단순한 촌락이 아니었다. 교회와 학교가 마을의 중심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며 민족의 앞날을 논하던 저항의 심장부였다. 현재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명동촌 언덕 위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생가에 올라 그가 매일 보았을 해란강(海蘭江)과 드넓은 만주 벌판을 바라보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 노래했던 그의 시 '향수'가 절로 떠오른다. 이곳의 모든 풍경이 그의 시의 일부였던 것이다. 제2부: 별과 십자가, 고뇌하는 영혼 윤동주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상징은 '부끄러움'과 '자기성찰'이다. 이러한 정서는 그가 다녔던 은진중학교 시절에 싹텄다. 당시 은진중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다 여러 차례 탄압을 받은 민족학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고종사촌 송몽규를 만난다. 적극적이고 행동가였던 송몽규와 달리, 내성적이고 사색적이었던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지 못하고 시를 쓰는 자신을 늘 부끄러워했다. 이러한 고뇌는 그의 대표작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로 시작하는 **'별 헤는 밤'**은 그가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고향 북간도를 그리며 쓴 시다. 시에 등장하는 '패, 경, 옥' 등은 명동촌에서 함께 자란 누이와 친구들의 이름이다. 고향의 밤하늘을 수놓았을 별들을 헤아리며, 그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고뇌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자신을 비춰보는 매개체인 우물은 용정의 상징이자, 끝없는 자기성찰의 도구였다. 그는 우물 속 사나이가 미워졌다가, 가여워졌다가, 다시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화해하고 또 갈등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에게 명동교회의 십자가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시로 남겼다. 제3부: 시대의 비극, 두 청년의 엇갈린 길 시를 통한 저항을 꿈꿨던 윤동주와, 직접 행동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송몽규. 두 청년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와 맞섰다. 더 넓은 학문을 배우고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들의 운명을 가른 비극적 선택이었다. 나라를 잃은 청년에게 일본 유학은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고, 이는 더 큰 고뇌와 부끄러움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1943년,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송몽규는 적극적인 독립운동 계획이 드러나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윤동주는 별다른 혐의가 없었음에도 송몽규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들이 수감된 곳은 악명 높은 후쿠오카 형무소. 이곳에서 두 청년은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며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짙다. 결국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뒤 이상해졌다"는 옥중 동료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차가운 감방에서 숨을 거둔다. 송몽규 역시 그의 뒤를 이어 3월 7일에 옥사했다. 조국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제4부 결론: 왜 우리는 여전히 윤동주를 부르는가 윤동주의 시는 그의 사후, 친구였던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원고 덕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이 유고 시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위대한 시인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왜 그토록 윤동주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그의 시가 단 한 순간도 순결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의한 시대에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성찰했던 그의 정직한 목소리는, 온갖 불의와 타협에 무뎌진 현대인들의 양심을 깨운다. 그는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과 시 자체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북간도 명동촌의 언덕 위에 서면, 지금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단순한 문학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아있다.
    • 기획특집
    • 역사산책
    2025-08-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