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율'의 시대는 갔다, '안정'을 확보하는 국가가 생존한다
과거 30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 온 '효율성'이라는 금과옥조가 깨지고 있다. 가장 값싼 곳에서 생산해 가장 필요한 곳으로 실어 나르던 글로벌 분업 체계는 이제 옛말이 되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예상치 못한 팬데믹은 '비용'보다 '안정'이, '효율'보다 '회복력'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제 글로벌 공급망은 '안보'라는 새로운 중력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경제는 그 어떤 나라보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효율적인 생산망의 핵심 플레이어로서 성장해왔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해, 그 생산망의 작은 균열 하나가 우리 경제 전체를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구조적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1년 경험했던 차량용 반도체 대란과 요소수 품귀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예고편이었다.
이제 '경제 안보'는 더 이상 외교·안보 부처에서나 다루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는 우리 기업의 생존과 국민의 일자리가 걸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민생 문제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추진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은 동맹국에게조차 국익 앞에서는 양보가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보여준다. 중국 역시 핵심 광물과 원자재를 전략적으로 통제하며 '자원의 무기화'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이처럼 거친 파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이상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수동적으로 학습할 시간은 없다. 이제는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첫째, 공급망 다변화가 시급하다. 특정 국가에 90% 이상 의존하는 '절대 의존 품목'부터 위험도를 재평가하고,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통해 우방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며, 국내 생산 기반을 확충하는 '리쇼어링(reshoring)'을 과감히 유도해야 한다.
둘째, 기술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등 우리가 우위를 가진 '초격차 기술'은 더욱 발전시키고, 핵심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력을 확보하여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리의 협상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경제 안보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 민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부는 주요국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해 조기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업의 공급망 다변화 노력을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 등으로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
과거에는 좋은 물건을 싸게 만드는 기업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한 기업, 그리고 그 기업을 뒷받침하는 국가가 살아남는 시대다. '경제 안보'는 더 이상 비용이 아닌,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