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23(토)
 
  •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분쟁 지대… 하나의 문명은 어떻게 두 개의 적대국이 되었나?

 

 

 

1947년 8월, 대영제국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불렸던 인도는 20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파티션(Partition, 분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비극이 인도 아대륙을 덮쳤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와 난민 행렬이 발생했다. 하나의 문명권을 공유했던 형제들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총칼을 겨눴고, 그날의 상처는 7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은 채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었다. 특히 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슈미르’라는 분쟁의 핵이 언제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게 한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세 번째 편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두 적대적 형제의 탄생과 끝나지 않는 갈등의 역사를 10,000자 분량으로 심층 분석한다.

 

 

 

1. 분할의 씨앗: 영국의 '분할 통치'와 종교 갈등의 격화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식민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해왔던 인도 아대륙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식민 통치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기존 사회적, 종교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인도인들의 단합된 저항을 막으려 했다. 1905년 벵골 분할령이 대표적인 예다. 영국은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로 나누어 양측의 종교적 대립을 격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인도 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종교를 초월한 세속적이고 단일한 인도를 지향했다.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 지도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종교와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에서 힌두 민족주의 색채가 점차 강화되자, 무슬림 지도자들은 정치적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권익이 다수파인 힌두교도에 의해 침해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초기 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의 권익 보호를 목표로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변호사 출신의 냉철한 정치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무슬림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분리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 질서와 문화를 가진 '두 개의 민족(Two-Nation Theory)'이며, 따라서 무슬림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진나의 '파키스탄(순수한 자들의 땅)' 구상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 피로 그은 국경선: 1947년 '파티션'의 비극

 

 

1947년,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 마운트배튼은 영국의 조속한 철수를 목표로 인도 분할을 기정사실화했다. 인도의 분할 방식과 국경선을 결정하는 임무는 영국의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에게 맡겨졌다. 인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낡은 지도와 인구 통계 자료에만 의존해 불과 5주 만에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래드클리프 라인)을 급조했다.


이 국경선은 수백 년간 함께 살아온 마을과 공동체, 심지어 한 가족의 집까지 하루아침에 갈라놓았다. 특히 무슬림, 힌두교도, 시크교도가 섞여 살던 펀자브와 벵골 지역의 분할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15일 인도가 각각 독립을 선포하자, 국경선 반대편에 살게 된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광기 어린 폭력이 인도 아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무슬림을, 무슬림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공격했다. 집단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이 자행되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사라졌다. 이 끔찍한 종교 폭동으로 인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약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맞는 국가를 찾아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극적인 강제 이주였다. 기차는 양측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을 싣고 국경을 넘나들었고, '유령 열차'라 불리며 분할의 참상을 증언했다. 이 '파티션'의 상처와 증오는 독립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원죄가 되었다.

 

 

 

3. '지상의 낙원'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카슈미르 분쟁

 

 

분할 과정에서 대부분의 번왕국(토후국)들은 종교 인구 구성에 따라 인도 혹은 파키스탄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계곡 잠무-카슈미르는 예외였다. 이곳은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통치자인 마하라자(번왕)는 힌두교도인 하리 싱이었다. 그는 독립 국가로 남기를 원하며 귀속 결정을 미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부족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면서부터다. 다급해진 하리 싱은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는 카슈미르의 인도 귀속을 조건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규군이 개입하면서 양국 간의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8)**이 발발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49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며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정된 **정전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을 기준으로 카슈미르는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전체의 약 2/3)와 파키스탄령 아자드-카슈미르(약 1/3)로 분할되었다. 유엔은 카슈미르의 최종 귀속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인도는 파키스탄군의 완전 철수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며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양국 간 갈등의 핵심이자 세 차례의 전면전과 수많은 국지전의 무대가 되었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파키스탄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무장 세력을 침투시켜 주민 봉기를 유도하려다 실패하면서 발발했다.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이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련의 중재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카르길 전쟁 (1999): 파키스탄군이 LoC를 넘어 인도 측 카르길 지역의 고지대를 점령하면서 발발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양국이 핵보유국이 된 이후 처음 벌어진 군사 충돌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큰 우려를 낳았다. 결국 파키스탄은 국제적 압력 속에 철수했고,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2019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헌법 제370조를 폐지하여 70년간 잠무-카슈미르에 부여되었던 특별 자치 지위를 박탈하고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 조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파키스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카슈미르의 긴장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에도 LoC를 따라 양국 군의 총격전과 테러리스트의 침투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4. 방글라데시의 탄생과 핵무장: 확전되는 갈등

 

 

양국의 갈등은 카슈미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71년, 분쟁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한번 폭발했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아대륙을 사이에 두고 1,600km나 떨어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 기이한 형태의 국가였다. 언어, 인종,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지역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하나만으로 묶여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던 서파키스탄은 벵골인이 대다수인 동파키스탄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억압했다.


1970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두자, 서파키스탄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벵골인이 학살당하고, 천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인도는 이를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동파키스탄의 독립군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이것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71)**이다.


전쟁은 단 13일 만에 인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파키스탄군은 항복했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이 패배는 파키스탄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고, 인도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고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인도가 1974년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8년 5월, 인도가 두 번째 핵실험을 단행하자 파키스탄 역시 며칠 간격으로 핵실험을 실시하며 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로써 인도 아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분쟁 지대로 변모했다. 양측의 재래식 군사 충돌이 언제든 상대방의 오판을 불러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5. 끝나지 않는 대결: 테러리즘과 위태로운 평화

 

 

카르길 전쟁 이후 양국은 전면전을 피하는 대신,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파키스탄, 특히 군부와 정보기관(ISI)은 카슈미르의 분리주의 무장 단체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을 은밀히 지원하여 인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11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테러 조직 라슈카르에타이바가 인도의 경제 중심지 뭄바이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자행하여 166명이 사망한 사건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이 외에도 인도 의회 테러(2001), 파탄코트 공군기지 테러(2016), 풀와마 자폭 테러(2019) 등 파키스탄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물론 양국 관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심라 협정, 1999년 라호르 선언 등을 통해 양국 정상은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크리켓 외교, 버스 노선 개통 등 다양한 신뢰 구축 조치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시도는 번번이 대규모 테러나 국내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강력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난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 78년 전 '파티션'의 광기 속에서 태어난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라는 비극적 공통점을 가진 두 형제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여전히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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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그은 국경선’, 78년의 증오: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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