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년의 대장정, 4,000km의 망명길...그 처절하고 위대한 여정
- 일제의 칼날을 피해 중국 대륙을 떠돌며 지켜낸 꺼지지 않는 독립의 불꽃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한 평범한 건물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3.1 만세운동의 열망을 안고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러나 환호와 축복 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나라도, 군대도, 재정도 없이 오직 꺼지지 않는 독립의 의지 하나만을 자산으로 삼아야 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27년. 상하이를 시작으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를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은 장장 4,000km에 달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일제의 추격을 피하고, 열강의 냉대 속에서 생존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내 희망을 지켜낸 위대한 망명길이었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역사의 상흔과 선열들의 숨결이 밴 그 '잊혀진 길'을 따라 걸으며 오늘날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근원을 되새겨 본다.
제1부: 상하이(1919~1932) - 희망과 혼돈의 교차점
상하이의 심장부, 화려한 명품관과 세련된 노천카페가 즐비한 신천지(新天地) 거리.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이곳의 바로 곁,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붉은 벽돌의 3층 석고문(石庫門) 건축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우리 선조들은 번영하는 상하이의 이면에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당시 상하이는 각국 열강의 조계지가 얽힌, 동아시아의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특히 프랑스 조계지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일본 경찰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임시정부는 이 위태로운 울타리 안에서 민주공화제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전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알렸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는 등, 비록 성과는 미미했을지언정 주권 국가로서의 외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 역시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활동 자금은 늘 쪼들렸고, 일제 밀정들의 감시는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이런 절박함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낳았다. 일왕의 생일 기념식장을 피로 물들인 이 의거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중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통쾌한 승리의 대가는 혹독했다. 눈에 불을 켠 일제는 프랑스 조계지를 무시하고 무차별 검거에 나섰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며 뿔뿔이 흩어져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3년간 희망과 혼돈의 터전이었던 상하이를 뒤로하고, 기약 없는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제2부: 유랑(1932~1938) - 기약 없는 길 위에서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의 여정은 '정부의 이전'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도피'에 가까웠다. 특히 60만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백범 김구 주석의 피난길은 한 편의 첩보 영화와도 같았다. 그는 중국인 친구였던 저장성 도서관장 추푸청(褚輔成)의 도움으로, 그의 선량한 사위인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의 배에 몸을 싣는다. 이후 1년 가까이 자싱(嘉興)의 호수 위를 떠도는 배 안에서 숨어 지내며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렸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궂은 뱃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나라의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주애보 부부를 안심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난징, 창사 등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계속해서 이동했다. 흩어진 요인들 간의 소통은 단절되기 일쑤였고, 활동 자금은 거의 고갈 상태였다.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부의 이념 갈등은 극에 달해, 한때 국무회의조차 열지 못할 정도로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잠시 정착했던 창사(長沙)는 또 다른 비극의 무대였다.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보려던 찰나, 조선혁명당 소속의 청년 이운한이 쏜 총탄에 김구 주석이 쓰러지는 '남목청 사건'이 발생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동지라 믿었던 이에게 총을 맞은 충격은 임시정부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얼마 뒤에는 일본군의 진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방화로 창사 시내의 90%가 불타는 대참사까지 겪으며, 임시정부는 또다시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제3부: 충칭(1940~1945) -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치는 남부 내륙으로의 피난길은 이전보다 더욱 처절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과 굶주림,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이름 없이 스러져갔다.
이 기나긴 어둠의 터널 끝에 다다른 곳이 바로 중국의 전시수도 충칭(重慶)이었다. 안개와 가파른 언덕으로 유명한 이 '산의 도시(山城)'는 일본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천연 요새였다. 임시정부는 이곳 연화지(蓮花池)에 마지막 청사를 마련하고, 27년 망명사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허름하고 비좁은 청사였지만,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비로소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숙원이던 정규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며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당시 임시정부의 생존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장제스 총통은 김구 주석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며 매달 상당한 금액의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한시준 교수는 "국민당의 지원이 없었다면 충칭 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이는 윤봉길 의거 이후 형성된 한중 간의 연대 의식이 낳은 중요한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었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한반도 내 진공을 목표로 하는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며 조국 해방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의 손에 직접 해방을 쟁취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0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 그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중략)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로 돌아갔다."
제4부 결론: 길 위에서 역사를 묻다
1945년 11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선장군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그들이 27년간 지켜온 '정부'의 정통성은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이어진 4,000km의 길은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고 '잊혀진 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길은 결코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시작해 온갖 시련 속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의 법통, 그리고 독립을 향한 신념을 목숨처럼 지켜낸 위대한 승리의 기록이다. 이 길 위에는 김구, 김규식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가 서려 있다.
중국 대륙 곳곳에 점처럼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국가의 뿌리를 되새기는 성스러운 순례의 여정이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