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Home >  기획특집
실시간뉴스
실시간 기획특집 기사
-
-
중국 '부동산 불패' 신화의 종언
- 과거 중국 경제 성장의 30%를 견인했던 부동산 신화는 이제 끝없는 악몽이 되었다. 2021년 헝다(Evergrande) 사태로 시작된 위기는 비구이위안(Country Garden) 등 대형 개발업체들의 연쇄 부실로 이어지며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하는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완공 아파트(烂尾楼) 문제로 평생 모은 돈을 날린 수분양자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부동산 시장의 장기 침체는 소비 심리 위축과 내수 부진의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 한때 14억 대륙의 부(富)를 견인하며 '불패 신화'로 불렸던 중국의 부동산 시장이 거대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다. 2021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헝다(恒大) 그룹의 파산을 시작으로, 업계 1위였던 비구이위안(碧桂園)마저 채무 불이행 늪에 빠지면서 위기는 중국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시스템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 화려한 마천루 아래, 완공됐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鬼城)'**가 스산한 모습을 드러내고, 공사가 중단된 채 흉물로 방치된 **'란웨이러우(烂尾楼)'**에 갇힌 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라는 집단행동으로 폭발했다. 중국 부동산 위기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 '유령도시', '부동산 그룹 도산', '서민들의 반발'을 통해 그 실태를 심층적으로 진단하고, 중국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도전을 조명한다. 제1부: 텅 빈 도시의 신기루, '유령도시(鬼城)' 중국 부동산 버블의 가장 기괴하고 상징적인 장면은 바로 '유령도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 불 꺼진 사무용 빌딩, 텅 빈 쇼핑몰이 끝없이 펼쳐진 도시. 이는 중국식 개발 모델의 탐욕과 광기가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원인 1: 지방정부의 'GDP 숭배'와 토지재정 모든 문제의 근원은 중국 지방정부의 왜곡된 재정 구조에 있다. 중국 지방정부 관리들의 인사고과에 가장 중요한 지표는 관할 지역의 GDP 성장률이었다. 단기간에 GDP 수치를 끌어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규모 건설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들은 '토지재정(土地财政)'이라는 비정상적인 수입 모델에 의존했다. 농민들로부터 싼값에 수용한 토지를 기반 시설을 갖춘 개발용지로 바꿔 부동산 개발업체에 비싸게 팔아넘기는 방식이다. 이 토지 매각 수입은 지방정부 재정의 4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개발업체는 비싸게 산 땅값을 분양가에 전가했고, 이는 고스란히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실제 수요와 무관하게 '일단 짓고 팔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시 외곽에 거대한 신도시들이 경쟁적으로 건설되었고, 이는 유령도시의 탄생을 예고했다. 원인 2: 투기 수요가 만들어낸 거품 중국 서민들에게 부동산은 가장 확실한 부의 축적 수단이었다. 불안정한 주식 시장과 엄격한 외환 통제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가계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렸다. '오늘 사는 게 가장 싸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사람들은 실제 거주 목적이 아닌,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적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사들였다. 개발업체는 이런 투기 심리를 이용해 미래 수요를 과장하며 계속해서 아파트를 지어 올렸다. 이렇게 공급된 수많은 아파트는 실제 거주자가 채우지 못한 채 빈집으로 남아 유령도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대표적 사례: 오르도스 캉바스 신구> '유령도시'의 대명사로 불리는 곳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오르도스 캉바스 신구다. 풍부한 석탄 자원을 바탕으로 100만 명 규모의 최첨단 도시를 꿈꿨지만, 무리한 개발과 자원 경기 하락이 겹치면서 도시는 유령처럼 변했다. 잘 닦인 8차선 도로 위에는 자동차보다 모래바람이 더 자주 보이고, 현대적인 건축물들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텅 비어 있다. 이는 수요를 무시한 공급 위주의 개발이 어떤 비극적 결과를 낳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제2부: '거인의 몰락', 부동산 그룹의 연쇄 도산 유령도시라는 거대한 버블을 만들어낸 주역인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차례로 쓰러지고 있다. 그 시작은 헝다 그룹이었다. 1)'헝다 쇼크': 빚으로 쌓아 올린 제국의 붕괴 헝다 그룹은 '세 개의 허리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격적인 부채 경영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즉, 정부(토지), 은행(대출), 구매자(선분양 자금)라는 세 개의 허리띠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헝다는 부동산으로 번 돈을 다시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을 넘어, 전기차, 프로 축구단, 생수, 금융업 등 관련 없는 분야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했다. 이러한 폭주에 제동을 건 것은 중국 정부였다. 부동산 시장 과열이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2020년, 개발업체의 부채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3대 레드라인(三道红线)'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사실상 부채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의 돈줄을 막아버리는 조치였다. 새로운 대출이 막히자 헝다는 순식간에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결국 3,000억 달러(약 400조 원)가 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2021년 공식적인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2)도미노처럼 번지는 위기: 비구이위안의 디폴트 헝다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한때 업계 1위이자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던 비구이위안마저 2023년 달러 채권 이자를 갚지 못하며 채무 불이행 위기에 빠졌다. 헝다가 대도시 중심의 무리한 사업 다각화로 무너졌다면, 비구이위안은 주로 3, 4선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다 부동산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부동산 위기가 일부 부실 기업의 문제가 아닌, 업계 전반에 퍼진 구조적 문제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현재 수십 개의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져 있으며, 중국 부동산 시장은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제3부: 서민들의 반발, '란웨이러우'와 '대출 상환 거부' 부동산 그룹의 도산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 피해는 평생 모은 돈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었던 수많은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1)꿈이 멈춘 곳: 란웨이러우(烂尾楼) '썩은 꼬리 건물'이라는 뜻의 **'란웨이러우'**는 개발업체의 자금난이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건물을 말한다. 중국의 독특한 '선분양' 제도는 란웨이러우를 양산하는 주범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아파트 골조만 올라가도 분양 대금의 대부분을 미리 내야 한다. 개발업체들은 이 돈으로 건물을 완공하는 대신, 다른 사업에 투자하거나 빚을 갚는 데 유용했다. 그러다 자금줄이 막히자 공사는 기약 없이 중단되었고, 아파트는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도시의 흉물로 방치되었다. 수분양자들은 평생 모은 돈을 날리고, 입주도 못한 채 매달 수백만 원의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 일부는 전기와 수도도 없는 란웨이러우에 직접 들어가 살며 처절한 저항을 하기도 했다. 2)최후의 저항: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 운동(停贷潮)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수분양자들은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2022년 여름, 장시성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된 **'주택담보대출 상환 거부 운동'**은 SNS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공사를 재개하지 않으면, 대출 상환도 재개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집단행동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 100여 개 도시, 300여 개 아파트 단지로 확산되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 정권에 심각한 경고였다. 개인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집단행동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체제를 위협하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운동이 금융 시스템 부실로 이어질 경우, 부동산 위기가 금융 위기로 전이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촉발할 수도 있었다. 중국 정부가 서둘러 란웨이러우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금 지원에 나선 것도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4부: 기로에 선 중국, 고통스러운 전환의 시작 중국의 부동산 위기는 단순한 경기 순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난 40년간 중국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 온 '부채 주도 성장 모델'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다. 시진핑 정부 역시 "집은 거주하는 곳이지 투기 대상이 아니다(房住不炒)"라고 선언하며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환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동산 시장의 경착륙을 막기 위해 정부가 각종 부양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미 신뢰를 잃고 수요가 얼어붙은 시장을 되살리기엔 역부족이다. 수많은 유령도시와 란웨이러우,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남긴 천문학적인 부채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다. 중국 부동산 위기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G2 경제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균열은 세계 경제에 거대한 불확실성을 드리우고 있다. '만들면 팔린다'는 성공 방정식에 취해 있던 중국은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텅 빈 도시의 신기루가 걷히고, 부채의 파티가 끝난 자리에서 중국이 어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
- 기획특집
- 중국이슈
-
중국 '부동산 불패' 신화의 종언
-
-
동북공정, 역사 침탈, 문화 도용: 21세기 중국의 거대 프로젝트
-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줄임말인 동북공정은 고구려,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국가적 프로젝트다. 이는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흔드는 심각한 ‘역사 침탈’ 행위로, 학술적 논쟁을 넘어 국민적 감정 대립으로 비화했다. 따라서 21세기 대한민국과 중국의 관계를 논할 때,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네 글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2002년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2007년 막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역사 프로젝트는 단순한 학술 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의 국가적 필요에 의해 기획되고, 치밀한 논리 아래 실행되었으며, 양국의 국민 감정을 최악으로 치닫게 한 ‘역사 전쟁’의 서막이었다. 프로젝트가 공식 종료된 지 18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 망령은 ‘김치공정’, ‘한복공정’과 같은 ‘문화공정’의 형태로 되살아나 오늘날까지도 양국 관계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왜 시작되었고, 어떤 논리로 우리의 역사를 침탈했으며, 한국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 유산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23여 년의 시간을 해부한다. 제1부: 동북공정의 서막 - 용은 왜 역사를 탐하기 시작했는가?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도하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가 조용히 시작되었다.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研究工程)’.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 연구 프로젝트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동북공정’이다. 겉으로는 학술 연구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이면에는 냉철한 정치·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1) 전략적 불안감: 한반도 통일과 국경 안정 문제 동북공정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은 1990년대 이후 중국이 느끼기 시작한 전략적 불안감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다. 중국의 지도부는 머지않은 미래에 한반도가 통일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체제 불안정성이 가시화되면서, 북한 붕괴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후폭풍은 중국의 핵심 안보 현안으로 떠올랐다. 중국이 우려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통일 한국이 친미(親美) 성향을 띠게 될 경우,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통일 국가가 미군과 함께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맞대게 되는 상황이다. 둘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 바로 영토 분쟁의 가능성이었다. 현재 중국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이다. 이 지역에는 200만 명에 가까운 조선족(朝鮮族)이 거주하고 있다. 만약 한반도가 통일되고, 통일 한국이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경우, 이는 중국 동북 지역의 안정과 ‘중화민족’의 통합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러한 잠재적 위협의 싹을 사전에 제거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미래에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영토 분쟁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 그것이 동북공정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2) 이데올로기적 토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바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이다. 이는 현대 중국의 역사관을 지배하는 핵심 이데올로기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는 모두 중국 역사의 일부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족(漢族)이 세운 국가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청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모두 중국사다. 문제는 이 논리를 한반도와 직접 관련된 고대사, 즉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하므로, 이들 역시 중국의 역사, 구체적으로는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56개 소수민족 중 하나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과거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전형적인 ‘역사공학’이다. 독립적인 국가였던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중앙 왕조의 ‘지방 정권’으로 격하시키고, 그 역사를 중국사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버리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2부: 동북공정의 논리 -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가? 동북공정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학술적 성과를 무시하고, 사료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들의 핵심 논리와 그에 대한 한국 학계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고구려(Goguryeo) 왜곡 1)동북공정의 주장: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근거 ① - 조공(朝貢) 관계: 고구려가 중국의 여러 왕조에 조공을 바쳤으므로, 이는 종속 관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근거 ② - 책봉(冊封) 관계: 중국 황제가 고구려 왕을 ‘요동군공 고구려왕(遼東郡公 高句麗王)’ 등으로 책봉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의 제후국이었다고 주장한다. 근거 ③ - 영토 문제: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가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현도군(玄菟郡) 관할 내에 있었으므로, 시작부터 중국의 영토 안에서 출발했다는 논리를 편다. 2)한국 학계의 반박: "고구려는 독자적 천하관을 가진 독립 주권 국가였다." 조공에 대한 반박: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조공-책봉은 일종의 외교 형식이었으며, 정치적 종속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공은 선진 문물 습득과 안정적인 무역 관계 유지를 위한 실리 외교의 수단이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조공을 보내는 등, 국제 관계를 주체적으로 운영했다. 책봉에 대한 반박: 책봉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왕의 지위를 인정받는 책봉을 받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태왕(太王)’이라는 황제급 칭호를 사용하고 ‘영락(永樂)’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는 다른,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독자적 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영토 문제에 대한 반박: 한사군의 위치와 영역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으며, 설령 초기 영토가 일부 겹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구려는 수(隋)·당(唐)과 같은 통일 제국과 수십 년간 대규모 전쟁을 치르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강력한 독립 국가였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수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 당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공한 ‘내란’을 역사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명백한 모순이다. 2. 발해(Balhae) 왜곡 1)동북공정의 주장 :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 행정기관이자, 말갈족이 주체가 된 국가이다." 근거 ① - 책봉 관계: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받았으므로, 발해는 당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근거 ② - 민족 구성: 발해의 주민 다수가 말갈족이었으므로,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2)한국 학계의 반박 :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명백한 한국사 국가이다." 책봉에 대한 반박: 대조영이 책봉을 받은 것은 국가를 세운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이는 발해의 실체를 사후에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高麗, 고구려)’라 칭했고,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도 발해 국왕을 ‘고려 국왕’으로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민족 구성에 대한 반박: 발해는 고구려 유민인 지배층과 말갈족인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으나,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지배층의 계승 의식과 문화의 연속성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의 구조는 당나라 장안성의 영향을 받았지만, 온돌 난방 시설, 불상 양식, 무덤 양식 등에서는 고구려 문화의 특징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제3부: 실행과 확산 - 보이지 않는 역사 침탈의 전선 동북공정은 단순히 학술 논문을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중국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왜곡된 역사관을 자국민에게 주입하고, 나아가 국제 사회에 기정사실화하려는 전방위적인 작업을 펼쳤다. 1)교과서와 박물관 :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되기 시작했다.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 박물관이나 랴오닝성(遼寧省) 박물관 등의 전시 내용은 고구려가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통치를 받은 지방 정권이라는 식의 설명으로 채워졌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핵심 유물에 대한 접근은 통제되었고,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2)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도 : 동북공정의 야심이 국제적으로 드러난 결정적 사건은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단독 등재 시도였다. 중국은 2003년 자국 내 고구려 유적을 단독으로 등재하려 했다. 이는 고구려사가 자국의 역사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는 매우 교묘하고 치밀한 전략이었다. 한국 정부와 학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04년 7월 남한과 북한에 있는 고구려 유적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 각각 별개의 유산으로 동시에 등재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 의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3)인터넷과 대중 매체 : 바이두(Baidu)와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로 버젓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 중앙방송(CCTV)은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담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는 등, 대중 매체를 통한 역사관 전파에도 주력했다. 제4부: 한국의 대응과 갈등의 격화 - 뒤늦은 각성과 상처뿐인 합의 동북공정이 시작된 초기, 한국 정부와 학계는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이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회적 공론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2004년, 중국의 유네스코 등재 시도와 함께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사 관련 개요에서 고구려사 부분이 삭제되고,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었다는 내용이 기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국민적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시민단체들은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고, 정치권에서도 초당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한국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강력히 항의했고, 이는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 갈등으로 비화했다. 결국 2004년 8월, 양국은 "역사 문제의 정치 쟁점화를 막고, 학술 교류를 통해 해결하며,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의 한국사 귀속성을 인정하는 한국 측의 입장에 유의한다"는 내용의 5개 항 구두 양해에 합의했다. 이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중국은 공식적인 역사 왜곡은 자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학술 연구라는 이름 아래 동북공정은 계속 진행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긴급히 설립했고, 이후 이를 확대 개편하여 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공정의 논리에 대응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올바른 역사를 국내외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학계와 시민 사회에서도 VANK와 같은 단체들이 인터넷을 통해 중국의 역사 왜곡을 알리는 등 자발적인 대응 노력이 이어졌다. 제5부: 동북공정 그 이후 - 끝나지 않은 '문화공정'의 시대 2007년, 5년간의 공식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면서 동북공정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고대사에 집중되었던 역사 왜곡의 칼날은 이제 한국의 고유한 생활 문화와 예술 전반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문화공정(文化工程)’**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화공정은 동북공정의 논리, 즉 ‘중국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중국의 것’이라는 논리를 문화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고대사 논쟁이 학술적 영역에 머물렀다면, 문화공정은 대중의 일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더욱 교묘하고 파급력이 크다. 1)김치(Kimchi)와 파오차이(泡菜) : 중국은 한국의 김치가 자국의 절임 채소인 파오차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파오차이가 김치의 국제 표준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이는 한국인의 정체성과도 같은 음식 문화를 폄하하고 종속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되어 큰 반발을 샀다. 2)한복(Hanbok)과 한푸(漢服) : 중국의 일부 네티즌들과 매체는 한복이 명나라의 한푸(漢服)에서 유래했다며 ‘한푸 동북공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 복식을 중국 문화의 아류로 취급하는 이러한 주장은 특히 양국의 젊은 세대 간에 극심한 감정싸움을 유발했다. 3)역사 인물과 예술의 국적 세탁 : 중국은 지린성 옌볜 출신인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으로 표기하고, 아리랑, 판소리, 씨름 등 한국의 전통 문화유산을 자국의 소수민족 문화로 소개하며 조선족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공정은 과거 동북공정처럼 국가기관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관영 매체의 은근한 보도, 인플루언서(왕홍)의 SNS 활동, 애국주의 네티즌(소분홍, 小粉紅)의 조직적인 여론전 등 훨씬 더 분산되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며, 양국 국민, 특히 미래 세대의 상호 인식을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4)결론: 역사 전쟁의 폐허 위에서 미래를 묻다 동북공정은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가 자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웃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재단하고 침탈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21세기의 비극적인 실례다. 이 프로젝트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단순히 왜곡된 역사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중국에 대한 불신’이며, 중국 국민에게 주입된 ‘역사적 우월감과 편견’이다. 한번 파괴된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으며, 잘못 심어진 역사 인식은 세대를 넘어 이어지기 쉽다. 이제 우리는 동북공정이라는 폐허 위에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역사에 천착해야 하는가? 역사는 단순히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뿌리이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나침반이다. 우리의 뿌리를 부정당하고 나침반을 빼앗길 때, 우리는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의 고유한 가치와 위상을 지켜낼 수 없다. 동북공정과 그 변종인 문화공정에 맞서는 것은 맹목적인 반중(反中) 감정이나 국수주의적 대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 철저하고 엄밀한 학술 연구를 통해 우리의 논리를 단단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 사회를 설득하며, 우리 내부적으로는 역사 교육을 강화하여 미래 세대가 올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대응이 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낡은 경구는, 21세기 동북아의 지정학 속에서 여전히 서늘하고 유효한 진실로 남아있다.
-
- 기획특집
- 한중이슈
-
동북공정, 역사 침탈, 문화 도용: 21세기 중국의 거대 프로젝트
-
-
꺼지지 않는 동토의 불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별군사작전'을 선언하며 시작된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느덧 3년 차(2025년 8월 기준)에 접어들었다. 당초 수일 내 수도 키이우(러시아명 키예프)가 함락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과 서방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동남부 전선을 중심으로 한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졌다. 지난 3년간 수십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에너지·식량 위기, 신냉전 구도 고착화 등 전 지구적 파장을 낳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부터 참혹한 전쟁의 경과, 그리고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과 향후 전망을 알아본다. 제1부: 천 년의 애증, '키예프 루스'에서 갈라선 형제의 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 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나라의 뿌리는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Kievan Rus')'**에 닿아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면서 두 민족의 운명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러시아가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 반면, 우크라이나 지역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문화는 '소(小)러시아'의 방언과 풍습으로 폄하되며 억압받았다. 소련 시절의 상처는 더욱 깊다. 1930년대 스탈린의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홀로도모르(Holodomor, 대기근)'**가 발생,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을 겪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닌, 민족 말살을 위한 '의도된 학살'로 기억하며 러시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마침내 독립 국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안에 두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동부·남부 지역과 흑해 함대의 전략적 기지가 있는 크림반도는 갈등의 잠재적 뇌관으로 남았다. 제2부: 운명의 갈림길, 2014년 유로마이단과 크림반도 합병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친(親)러시아와 친(親)서방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분기점이 된 사건이 바로 2014년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이다. 2013년 11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협력 협정 체결을 중단하고 러시아로부터 150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수도 키이우의 독립광장(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해를 넘겨 이어졌고, 2014년 2월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축출되었고, 의회는 그를 탄핵한 뒤 친서방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러시아는 이를 서방이 배후에서 조종한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녹색 군인들(little green men)'이 크림반도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 가운데, 러시아의 비호 아래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러시아 귀속이 결정되었다. 2014년 3월 1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에서도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이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며 내전을 부추겼고, 이후 8년간 이어진 돈바스 전쟁으로 1만 4천여 명이 사망했다. 2014년의 이 일련의 사태는 우크라이나 영토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으며, 2022년 전면전의 서막이었다. 제3부: '특별군사작전', 21세기 유럽 최악의 전쟁 발발 8년간의 돈바스 내전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토의 동진(東進)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한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더 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 보장을 요구했으나, 미국과 서방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2022년 2월 24일 새벽,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탈나치화'를 명분으로 전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북쪽(벨라루스 경유), 동쪽(돈바스), 남쪽(크림반도) 세 방향에서 수도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우크라이나 군과 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서방의 신속하고 대대적인 군사 지원이 더해지면서 러시아의 '단기 섬멸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키이우 함락에 실패한 러시아군은 4월 초 수도권에서 퇴각한 뒤, 전쟁 목표를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와 남부 해안지대의 완전한 장악으로 수정했다. 이후 전쟁은 마리우폴, 세베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 등 동남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포격과 시가전이 반복되는 참혹한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리우폴에서는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가을,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에 성공하며 점령지를 일부 탈환했으나, 2023년 이후 러시아군이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에 막혀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현재 양측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참호선을 사이에 두고 드론, 포격,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는 1차 세계대전식의 지리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제4부: 전 지구를 덮친 전쟁의 그림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에 심각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1) 에너지·식량 위기 세계적인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맞물리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으며, 이는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세계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흑해 봉쇄로 막히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 아프리카와 중동의 저개발 국가들을 중심으로 식량 위기가 심화되었다. 2) 신냉전 구도 고착화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가 선명해졌다. 러시아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낀 핀란드와 스웨덴은 오랜 군사적 중립 노선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며 나토의 결속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서방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국제 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유엔 등 기존의 국제기구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3) 국제 질서의 재편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이 강대국에 의해 무력으로 훼손되면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이 부활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대만 해협, 남중국해, 한반도 등 다른 분쟁 지역에도 잠재적인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함께, 북한의 도발 및 북-러 군사 협력 강화라는 안보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5부: 안갯속의 출구, 끝나지 않은 전쟁의 미래 전쟁 3년 차에 접어든 현재,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평화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크라이나: 1991년 국경선 기준으로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에서의 러시아군 완전 철수와 전쟁 범죄자 처벌, 그리고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를 일부라도 포기하는 것은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러시아: 점령지(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주와 크림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 및 중립국화를 요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게 있어 전쟁의 패배는 곧 정치적 생명의 끝을 의미하기에 쉽게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만, 어느 하나도 쉬운 길은 아니다. 장기 소모전 지속: 현재와 같은 교착 상태가 수년간 더 이어지는 시나리오. 양국의 인적, 물적 손실이 극대화되지만,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가장 비극적인 전망이다. 휴전을 통한 '동결 분쟁'화: 양측이 소모전에 지쳐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에 합의하는 시나리오. 이는 한반도와 같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얼어붙은 분쟁(Frozen Conflict)'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언제든 다시 충돌할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가 될 것이다. 내부 변수에 의한 급격한 종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급격한 정치적 변화(정권 붕괴, 쿠데타 등)가 발생하거나, 서방의 지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등의 변수로 인해 전쟁이 예상치 못하게 끝나는 시나리오. 결론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 국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다. 이 전쟁의 종식은 단순히 포성과 총성이 멎는 것을 넘어, 파괴된 도시의 재건, 수많은 난민의 귀환, 그리고 무엇보다 깊게 파인 증오와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아닌 대화와 외교, 그리고 국제법의 원칙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이 동토의 비극을 주시하고 있다.
-
- 기획특집
- 국제이슈
-
꺼지지 않는 동토의 불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
히말라야의 그림자, 중국-인도 국경 분쟁
- 21세기 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좌우할 두 거인,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사이에 두고 수십 년째 이어온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1962년 발발했던 국경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으며, 최근 몇 년간 발생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듯한 움직임도 있으나, 국경 지대에 증강 배치된 수만 명의 병력과 끊임없이 확장되는 군사 인프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오늘일보 국제이슈 기획 네 번째 시리즈에서는 중-인 국경 분쟁의 역사적 뿌리부터 최근의 군사적 대치 상황, 그리고 이 갈등이 동북아를 넘어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장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제1부: 역사의 덧칠, 분쟁의 씨앗이 된 '선' 중국과 인도가 맞댄 국경은 약 3,488km에 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국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국경선은 단 한 뼘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 그어진 두 개의 경계선, 즉 '존슨 라인(Johnson Line)'과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서 비롯됐다. 서부 국경의 분쟁지인 아크사이친(Aksai Chin) 고원은 존슨 라인과 관련이 깊다. 1865년 영국 측량사 윌리엄 존슨이 제안한 이 경계선은 아크사이친을 당시 잠무-카슈미르 왕국의 영토로 포함시켰다. 인도는 이를 계승하여 아크사이친이 자국령 라다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청나라 시대부터 실효적으로 지배해왔으며, 영국이 제안한 또 다른 경계선인 '매카트니-맥도널드 라인'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1950년대 인도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이곳에 신장과 티베트를 잇는 전략 도로(G219 국도)를 건설하며 실효 지배를 굳혔다. 동부 국경의 핵심 분쟁지는 인도가 실효 지배 중인 아루나찰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주다. 이곳의 경계는 1914년 영국, 티베트, 중국 대표가 모인 심라 회의에서 영국 측 대표였던 헨리 맥마흔이 제안한 '맥마흔 라인'을 따른다. 인도는 이 조약을 근거로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지만, 중국은 당시 티베트가 독립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중앙 정부의 최종 승인이 없었다는 이유로 맥마흔 라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 지역을 '짱난(藏南, 남티베트)'이라 부르며 약 9만㎢에 달하는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불분명하고 상호 인정되지 않은 국경선은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악화된 양국 관계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1962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크사이친과 동부 국경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며 **중-인 전쟁(Sino-Indian War)**이 발발했다. 한 달여간의 전쟁에서 인도는 참패했고, 중국은 아크사이친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이 전쟁은 인도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중국에게는 '인도의 팽창주의에 대한 응징'으로 기억되며 양국 국민의 가슴에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남겼다. 제2부: 총성 없는 전쟁, 21세기 국경 대치의 새로운 양상 1962년 전쟁 이후에도 국경에서의 긴장은 계속됐다. 1967년 시킴 국경의 나투 라(Nathu La)와 초 라(Cho La)에서 포격전이 벌어졌고, 1975년에는 아루나찰프라데시 툴룽 라(Tulung La)에서 매복 공격으로 인도군 4명이 사망하는 등 유혈 사태가 이어졌다. 이후 양국은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며 1993년 '실질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 LAC) 평화 및 안정 유지 협정'을 체결하는 등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 협정은 국경 지역에서 총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 발생하는 충돌이 주먹과 몽둥이, 돌 등이 동원되는 원시적인 '난투극'의 양상을 띠게 된 배경이 되었다.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들어 양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 인프라 건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충돌은 더욱 잦고 격렬해졌다. 1) 2017년 도클람 대치 (Doklam Standoff) 2017년 6월,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중국군이 인도-중국-부탄 3국의 국경이 만나는 도클람(중국명 둥랑, 洞朗) 고원에서 도로 건설을 시작하자, 부탄의 요청을 받은 인도군이 이를 저지하면서 73일간의 군사적 대치가 시작됐다. 도클람은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실리구리 회랑(Siliguri Corridor)'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폭이 20km에 불과해 '닭의 목'으로 불리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 7개 주를 잇는 유일한 통로다. 중국이 도클람에 도로를 건설할 경우, 유사시 인도 북동부 지역이 본토와 단절될 수 있다는 안보적 위기감이 인도군의 개입을 불렀다. 양국은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가다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앞두고 양국 군 동시 철수에 합의하며 대치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2) 2020년 갈완 계곡 충돌 (Galwan Valley Clash) 2020년 6월 15일 밤, 서부 국경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에서 양국 군 사이에 1975년 이후 45년 만에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인도 측이 실질통제선(LAC) 인근에 건설한 도로와 다리에 중국군이 이의를 제기하며 텐트를 설치하자, 이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총기 대신 못이 박힌 몽둥이와 돌, 주먹이 오가는 난투극 끝에 인도군 20명이 사망하고 중국군에서도 최소 4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인도 전역에 거대한 반중(反中)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양국 관계는 1962년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갈완 충돌 이후 양국은 국경 지대에 각각 5만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탱크, 전투기, 미사일 등 중화기를 전진 배치하며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제3부: 히말라야의 군비 경쟁 - 도로, 공항, 그리고 병력 갈완 충돌 이후, 중국과 인도는 국경 지대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으며 인프라 건설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병력 배치를 넘어, 유사시 신속한 병력과 물자 수송, 그리고 장기적인 주둔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 조치다. 중국: 중국은 '서부대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티베트 자치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철도와 도로, 공항 등 군사적으로 전용 가능한 인프라를 수십 년간 꾸준히 건설해왔다. 특히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와 국경 지역을 잇는 도로망과 칭짱철도는 대규모 병력과 보급품을 히말라야 고산지대로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대동맥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국경 인근에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하고 기존 공항 시설을 확장하며 공군력을 강화하는 한편, 국경 마을을 '샤오캉(小康)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요새화하여 민간인 거주와 군사적 전초기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인도: 과거 중국에 비해 국경 인프라 개발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도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 집권 이후 국경도로기구(BRO)를 중심으로 도로, 교량, 터널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갈완 충돌 이후에는 라다크 지역과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중심으로 모든 기상 조건에서 병력 이동이 가능한 도로망 확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인도는 또한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미국제 M777 초경량 곡사포와 아파치 공격헬기 등 최신 무기를 국경 지대에 집중 배치하며 중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1만 명에 더해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하기로 결정하는 등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군비 경쟁과 인프라 확충은 국경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안보 딜레마'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쪽의 방어적 조치가 다른 쪽에는 공격적 위협으로 인식되어 연쇄적인 군비 증강을 촉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지정학적 파장 - 미-중 대립의 또 다른 전선 중-인 국경 분쟁은 단순히 두 나라 간의 영토 문제를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갈완 충돌 이후 인도는 전통적인 '비동맹'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급격히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와 함께하는 4개국 안보 협의체 **쿼드(Quad)**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는 쿼드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 기술 이전과 정보 공유 등 실질적인 지원을 얻고 있다. 미국 역시 인도를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핵심 파트너로 보고,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 관계를 격상시키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이러한 행보를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판 나토'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중국을 포위하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중국의 싱크탱크들은 인도의 외교 정책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미국을 등에 업고 국경에서 더욱 대담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중-인 국경 분쟁은 미-중 전략 경쟁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갈등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편, 중국은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 인도의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인도를 압박하는 '진주 목걸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인도는 '동방 정책(Act East Policy)'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해군력을 증강하며 인도양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5부: 갈등과 협력 사이, 위태로운 미래 최근 중-인 관계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협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고 있다. 2024년 10월, 양국은 국경 지역에서의 단계적 병력 철수와 순찰로의 전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며, 2025년 8월에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2020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경 무역과 직항 항공편 운항을 5년 만에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양국 모두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원치 않으며, 세계 1, 2위의 인구 대국이자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진 양국 관계의 완전한 파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 노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빙 무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신뢰의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인도는 국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경 문제를 양자 관계의 일부로 국한하고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의 협력을 우선시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근본적인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중-인 국경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망한다. 양국 모두에게 국경 문제는 영토 주권을 넘어 국가적 자존심과 국내 정치적 지지 확보와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면전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더라도, 국경에서의 군사적 대치와 우발적 충돌의 위험은 상존할 것으로 보인다. 국경 지대에 수만 명의 병력이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작은 오판이나 우발적 사건이 언제든 대규모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살얼음판'과 같다.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에 드리운 용과 호랑이의 그림자는 21세기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지정학적 리스크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자들이 갈등의 확산을 막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
- 기획특집
- 국제이슈
-
히말라야의 그림자, 중국-인도 국경 분쟁
-
-
‘피로 그은 국경선’, 78년의 증오: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 1947년 8월, 대영제국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불렸던 인도는 20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파티션(Partition, 분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비극이 인도 아대륙을 덮쳤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와 난민 행렬이 발생했다. 하나의 문명권을 공유했던 형제들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총칼을 겨눴고, 그날의 상처는 7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은 채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었다. 특히 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슈미르’라는 분쟁의 핵이 언제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게 한다. 1. 분할의 씨앗: 영국의 '분할 통치'와 종교 갈등의 격화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식민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해왔던 인도 아대륙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식민 통치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기존 사회적, 종교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인도인들의 단합된 저항을 막으려 했다. 1905년 벵골 분할령이 대표적인 예다. 영국은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로 나누어 양측의 종교적 대립을 격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인도 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종교를 초월한 세속적이고 단일한 인도를 지향했다.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 지도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종교와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에서 힌두 민족주의 색채가 점차 강화되자, 무슬림 지도자들은 정치적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권익이 다수파인 힌두교도에 의해 침해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초기 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의 권익 보호를 목표로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변호사 출신의 냉철한 정치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무슬림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분리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 질서와 문화를 가진 '두 개의 민족(Two-Nation Theory)'이며, 따라서 무슬림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진나의 '파키스탄(순수한 자들의 땅)' 구상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 피로 그은 국경선: 1947년 '파티션'의 비극 1947년,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 마운트배튼은 영국의 조속한 철수를 목표로 인도 분할을 기정사실화했다. 인도의 분할 방식과 국경선을 결정하는 임무는 영국의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에게 맡겨졌다. 인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낡은 지도와 인구 통계 자료에만 의존해 불과 5주 만에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래드클리프 라인)을 급조했다. 이 국경선은 수백 년간 함께 살아온 마을과 공동체, 심지어 한 가족의 집까지 하루아침에 갈라놓았다. 특히 무슬림, 힌두교도, 시크교도가 섞여 살던 펀자브와 벵골 지역의 분할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15일 인도가 각각 독립을 선포하자, 국경선 반대편에 살게 된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광기 어린 폭력이 인도 아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무슬림을, 무슬림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공격했다. 집단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이 자행되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사라졌다. 이 끔찍한 종교 폭동으로 인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약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맞는 국가를 찾아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극적인 강제 이주였다. 기차는 양측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을 싣고 국경을 넘나들었고, '유령 열차'라 불리며 분할의 참상을 증언했다. 이 '파티션'의 상처와 증오는 독립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원죄가 되었다. 3. '지상의 낙원'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카슈미르 분쟁 분할 과정에서 대부분의 번왕국(토후국)들은 종교 인구 구성에 따라 인도 혹은 파키스탄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계곡 잠무-카슈미르는 예외였다. 이곳은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통치자인 마하라자(번왕)는 힌두교도인 하리 싱이었다. 그는 독립 국가로 남기를 원하며 귀속 결정을 미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부족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면서부터다. 다급해진 하리 싱은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는 카슈미르의 인도 귀속을 조건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규군이 개입하면서 양국 간의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8)**이 발발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49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며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정된 **정전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을 기준으로 카슈미르는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전체의 약 2/3)와 파키스탄령 아자드-카슈미르(약 1/3)로 분할되었다. 유엔은 카슈미르의 최종 귀속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인도는 파키스탄군의 완전 철수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며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양국 간 갈등의 핵심이자 세 차례의 전면전과 수많은 국지전의 무대가 되었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파키스탄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무장 세력을 침투시켜 주민 봉기를 유도하려다 실패하면서 발발했다.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이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련의 중재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카르길 전쟁 (1999): 파키스탄군이 LoC를 넘어 인도 측 카르길 지역의 고지대를 점령하면서 발발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양국이 핵보유국이 된 이후 처음 벌어진 군사 충돌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큰 우려를 낳았다. 결국 파키스탄은 국제적 압력 속에 철수했고,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2019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헌법 제370조를 폐지하여 70년간 잠무-카슈미르에 부여되었던 특별 자치 지위를 박탈하고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 조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파키스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카슈미르의 긴장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에도 LoC를 따라 양국 군의 총격전과 테러리스트의 침투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4. 방글라데시의 탄생과 핵무장: 확전되는 갈등 양국의 갈등은 카슈미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71년, 분쟁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한번 폭발했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아대륙을 사이에 두고 1,600km나 떨어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 기이한 형태의 국가였다. 언어, 인종,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지역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하나만으로 묶여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던 서파키스탄은 벵골인이 대다수인 동파키스탄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억압했다. 1970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두자, 서파키스탄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벵골인이 학살당하고, 천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인도는 이를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동파키스탄의 독립군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이것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71)**이다. 전쟁은 단 13일 만에 인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파키스탄군은 항복했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이 패배는 파키스탄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고, 인도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고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인도가 1974년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8년 5월, 인도가 두 번째 핵실험을 단행하자 파키스탄 역시 며칠 간격으로 핵실험을 실시하며 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로써 인도 아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분쟁 지대로 변모했다. 양측의 재래식 군사 충돌이 언제든 상대방의 오판을 불러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5. 끝나지 않는 대결: 테러리즘과 위태로운 평화 카르길 전쟁 이후 양국은 전면전을 피하는 대신,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파키스탄, 특히 군부와 정보기관(ISI)은 카슈미르의 분리주의 무장 단체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을 은밀히 지원하여 인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11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테러 조직 라슈카르에타이바가 인도의 경제 중심지 뭄바이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자행하여 166명이 사망한 사건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이 외에도 인도 의회 테러(2001), 파탄코트 공군기지 테러(2016), 풀와마 자폭 테러(2019) 등 파키스탄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물론 양국 관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심라 협정, 1999년 라호르 선언 등을 통해 양국 정상은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크리켓 외교, 버스 노선 개통 등 다양한 신뢰 구축 조치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시도는 번번이 대규모 테러나 국내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강력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난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 78년 전 '파티션'의 광기 속에서 태어난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라는 비극적 공통점을 가진 두 형제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여전히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
- 기획특집
- 국제이슈
-
‘피로 그은 국경선’, 78년의 증오: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
-
끝나지 않는 비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사
-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에 자리한 좁고 긴 땅. 유대인에게는 2000년 디아스포라의 종착점이자 신이 약속한 땅(Eretz Yisrael)이며,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수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Filastin)이다. 이 하나의 땅을 둘러싼 두 민족의 열망은 20세기를 관통하며 가장 해결하기 어렵고 폭력적인 분쟁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종교, 민족, 영토, 자원이 복잡하게 얽힌 이 갈등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정치의 대리전이자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두 번째 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씨앗부터 현재의 참상까지, 그 피와 눈물의 연대기를 알아본다. 1. 비극의 서막: 시오니즘과 영국의 이중 약속 오늘날 분쟁의 직접적인 뿌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전역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망을 키웠고, 그들의 시선은 성서에 기록된 고향, 팔레스타인을 향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 Aliyah)를 촉진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은 승리를 위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을 남발하며 훗날 닥쳐올 재앙의 씨앗을 뿌렸다. 1915년, 영국은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와의 서신 교환(맥마흔 서한)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하면 전후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암시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917년, 영국은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유대인 금융 자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아서 밸푸어 외무장관은 시오니즘 지도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서한(밸푸어 선언)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에는 "기존 비(非)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영국의 비호 아래 유대인 이주는 급증했고, 이들은 아랍인들의 토지를 사들이며 정착촌을 확장해 나갔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느끼며 저항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이민자들과 아랍 주민 간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다. 영국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못하는 모호한 정책으로 일관하며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2. '나크바'와 국가의 탄생: 1948년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자, 유대인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 동정 여론이 비등했다. 더 이상 갈등을 중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UN)**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둔다는 **결의안 181호(분할안)**를 채택했다. 당시 인구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던 유대인에게 전체 영토의 56%를 할당하는 이 안은 아랍 세계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외부 세력이 멋대로 나누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를 완료하자마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연맹 5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신생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 기간과 그 전후,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학살의 공포를 피해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아랍 측에 할당했던 영토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사건을 **'나크바(Al-Nakba, 대재앙)'**라고 부르며 민족사 최대의 비극으로 기억한다. 이 때 발생한 수많은 난민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및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난민촌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영토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요르단 합병)와 가자지구(이집트 통제)로 나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3. 6일 전쟁과 점령의 시대: 끝나지 않는 갈등의 심화 이후 중동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더 겪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선제공격하여 불과 6일 만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결과는 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특히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도시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수도'로 선포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점령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군정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정착촌은 '두 국가 해법'의 가장 큰 물리적 장애물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핵심 원인이 되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점령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쟁에서의 연패를 통해 군사력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로운 저항의 길을 모색했다.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 아래 무장 투쟁을 통해 국제 사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각인시켰다. 4.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희망과 좌절의 교차 1987년, 이스라엘의 20년에 걸친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멩이를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에 맞섰다.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로 불리는 이 저항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인티파다는 PLO의 위상을 높였고, 마침내 이스라엘과 PLO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다. 1993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양측은 비밀 협상 끝에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여 5년간의 자치 기간을 거친 뒤 영구적 지위에 관한 협상을 개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두 국가 해법'의 첫걸음으로 여겨진 이 협정으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희망은 짧았다. 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았고, 예루살렘, 난민 귀환권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1995년 평화의 주역이었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최종 합의에 실패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얼마 뒤,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이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자살 폭탄 테러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군사 보복이 뒤엉키는 제2차 인티파다로 번졌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오슬로 협정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곳곳에 거대한 분리 장벽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더욱 고립시켰다. 5. 하마스의 부상과 가자지구: '천장 없는 감옥'의 비극 오슬로 협정의 실패는 팔레스타인 내부에 또 다른 균열을 낳았다. 협상을 통한 평화 노선에 회의를 느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이슬람 저항 운동 **하마스(Hamas)**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자국 정착촌과 군대를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예상을 깨고 압승을 거두자, 이스라엘과 서방 세계는 하마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 원조를 중단했다. 결국 2007년, 하마스는 온건파 파타(Fatah)와의 내전 끝에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를 단행했다. 육상, 해상, 공중 모든 경로를 통제하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이 봉쇄로 인해 가자지구의 경제는 붕괴했고, 2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은 실업과 빈곤, 깨끗한 물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천장 없는 거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사 충돌을 벌였고, 그때마다 수많은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6. 현재와 미래: 벼랑 끝에 선 '두 국가 해법' 21세기 들어 평화 협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스라엘에서는 갈수록 강경한 우파 정권이 득세하며 정착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로 분열되어 통일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경: 팔레스타인은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독립 국가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주요 정착촌 블록을 자국 영토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가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정착촌: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에는 7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적 연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난민: 팔레스타인은 '나크바' 때 쫓겨난 난민과 그 후손들의 '귀환권'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는 국가의 유대적 정체성을 위협한다며 거부한다. 최근 몇 년간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가자지구에서는 주기적인 무력 충돌이 반복되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민들의 폭력과 이스라엘군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희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의 해법으로 여겨졌던 **'두 국가 해법'**은 계속되는 정착촌 확장과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성스러운 땅'에서 시작된 100년의 분쟁은 두 민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겼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평화는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있다. 국제 사회가 정의와 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하고 일관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약속의 땅'은 계속해서 절망과 비극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총성이 멎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정의에 기반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 기획특집
- 국제이슈
-
끝나지 않는 비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사
-
-
발칸의 피바람, 유고 인종청소
- 냉전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화합의 서사가 전 세계를 뒤덮던 1990년대, 발칸반도는 역사의 퇴보를 증명하듯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특정 민족과 문화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이 섬뜩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집단 학살, 강간, 추방의 광풍을 불러왔다. '남슬라브인의 땅'이라는 이상적 이름으로 탄생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어째서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는가. 오늘일보 기획특집 '5분 세계사 이슈 100선' 첫 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부터 피로 얼룩진 진행 과정,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발칸반도에 깊은 상흔으로 남은 결과와 과제를 알아본다. 1. 불안한 공존: 봉합되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을 단지 한 독재자의 광기나 순간의 정치적 격변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종교, 이념의 복잡한 갈등에 맞닿아 있다. 본래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보스니아인(이슬람), 슬로베니아인(가톨릭), 몬테네그로인(세르비아 정교),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정교) 등은 같은 남슬라브계라는 언어적 공통점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뚜렷한 개별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국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민족, 여섯 개의 공화국'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대한 타 민족의 불만을 낳으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갈등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려놓았다.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 '우스타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인 '체트니크'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다민족 연합의 파르티잔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한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통일(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눌렀다. 그는 각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여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민족주의적 발언이나 활동을 엄격히 처벌하며 갈등을 수면 아래로 잠재웠다. 그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간 외형적인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강력한 힘에 의한 '억압된 평화'였다. 2. 판도라의 상자: 민족주의의 망령이 깨어나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35년간 통치했던 '구심점' 티토가 사망하자 억눌려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8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고, 이는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하며 민족 갈등을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난한 남부 공화국,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89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열린 '가지메스탄 전투 6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전투와 마주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노골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 민족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타 민족(특히 알바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밀로셰비치의 선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1990년 각 공화국에서 실시된 다당제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발칸반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3. 지옥의 연대기: '인종청소'의 참혹한 전개 유고 내전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여 민족적으로 단일한 공간을 만들려는 '인종청소'가 전쟁의 핵심 전략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 - 크로아티아 전쟁 (1991-1995):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코바르, 두브로브니크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무차별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과 추방을 자행했다. -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인종청소가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된 곳은 '작은 유고슬라비아'라 불릴 만큼 다민족이 섞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라도반 카라지치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 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보스니아인(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 강간, 추방하여 세르비아인만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425일간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시민들은 저격과 포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포차, 비셰그라드 등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준군사조직이 보스니아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수용소'로 끌고 가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다.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이곳에 피신해 있던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 남성과 소년들을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었다. - 코소보 전쟁 (1998-1999): 보스니아 전쟁이 데이턴 협정으로 봉합된 후, 갈등의 무대는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 자치주로 옮겨갔다. 주민의 90%가 알바니아계였던 코소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밀로셰비치 정권은 '테러리스트 소탕'을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말발굽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 아래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 참상은 결국 NATO의 78일간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불러왔고, 전쟁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 상흔과 과제: 끝나지 않은 비극 10년에 걸친 전쟁과 인종청소는 발칸반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불신이었다. 한때 이웃으로 살았던 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끔찍한 기억은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국제 사회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하여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등 전쟁 범죄의 핵심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법적인 청산이 역사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의 복잡한 연방 체제 속에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와 국제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역사관을 고수하며,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화해는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민족주의라는 망령과 결합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발칸반도가, 그리고 인류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 기획특집
- 국제이슈
-
발칸의 피바람, 유고 인종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