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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나지 않는 비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사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에 자리한 좁고 긴 땅. 유대인에게는 2000년 디아스포라의 종착점이자 신이 약속한 땅(Eretz Yisrael)이며,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수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Filastin)이다. 이 하나의 땅을 둘러싼 두 민족의 열망은 20세기를 관통하며 가장 해결하기 어렵고 폭력적인 분쟁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종교, 민족, 영토, 자원이 복잡하게 얽힌 이 갈등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정치의 대리전이자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두 번째 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씨앗부터 현재의 참상까지, 그 피와 눈물의 연대기를 알아본다. 1. 비극의 서막: 시오니즘과 영국의 이중 약속 오늘날 분쟁의 직접적인 뿌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전역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망을 키웠고, 그들의 시선은 성서에 기록된 고향, 팔레스타인을 향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 Aliyah)를 촉진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은 승리를 위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을 남발하며 훗날 닥쳐올 재앙의 씨앗을 뿌렸다. 1915년, 영국은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와의 서신 교환(맥마흔 서한)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하면 전후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암시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917년, 영국은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유대인 금융 자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아서 밸푸어 외무장관은 시오니즘 지도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서한(밸푸어 선언)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에는 "기존 비(非)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영국의 비호 아래 유대인 이주는 급증했고, 이들은 아랍인들의 토지를 사들이며 정착촌을 확장해 나갔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느끼며 저항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이민자들과 아랍 주민 간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다. 영국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못하는 모호한 정책으로 일관하며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2. '나크바'와 국가의 탄생: 1948년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자, 유대인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 동정 여론이 비등했다. 더 이상 갈등을 중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UN)**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둔다는 **결의안 181호(분할안)**를 채택했다. 당시 인구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던 유대인에게 전체 영토의 56%를 할당하는 이 안은 아랍 세계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외부 세력이 멋대로 나누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를 완료하자마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연맹 5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신생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 기간과 그 전후,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학살의 공포를 피해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아랍 측에 할당했던 영토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사건을 **'나크바(Al-Nakba, 대재앙)'**라고 부르며 민족사 최대의 비극으로 기억한다. 이 때 발생한 수많은 난민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및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난민촌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영토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요르단 합병)와 가자지구(이집트 통제)로 나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3. 6일 전쟁과 점령의 시대: 끝나지 않는 갈등의 심화 이후 중동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더 겪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선제공격하여 불과 6일 만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결과는 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특히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도시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수도'로 선포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점령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군정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정착촌은 '두 국가 해법'의 가장 큰 물리적 장애물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핵심 원인이 되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점령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쟁에서의 연패를 통해 군사력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로운 저항의 길을 모색했다.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 아래 무장 투쟁을 통해 국제 사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각인시켰다. 4.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희망과 좌절의 교차 1987년, 이스라엘의 20년에 걸친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멩이를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에 맞섰다.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로 불리는 이 저항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인티파다는 PLO의 위상을 높였고, 마침내 이스라엘과 PLO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다. 1993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양측은 비밀 협상 끝에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여 5년간의 자치 기간을 거친 뒤 영구적 지위에 관한 협상을 개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두 국가 해법'의 첫걸음으로 여겨진 이 협정으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희망은 짧았다. 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았고, 예루살렘, 난민 귀환권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1995년 평화의 주역이었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최종 합의에 실패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얼마 뒤,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이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자살 폭탄 테러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군사 보복이 뒤엉키는 제2차 인티파다로 번졌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오슬로 협정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곳곳에 거대한 분리 장벽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더욱 고립시켰다. 5. 하마스의 부상과 가자지구: '천장 없는 감옥'의 비극 오슬로 협정의 실패는 팔레스타인 내부에 또 다른 균열을 낳았다. 협상을 통한 평화 노선에 회의를 느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이슬람 저항 운동 **하마스(Hamas)**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자국 정착촌과 군대를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예상을 깨고 압승을 거두자, 이스라엘과 서방 세계는 하마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 원조를 중단했다. 결국 2007년, 하마스는 온건파 파타(Fatah)와의 내전 끝에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를 단행했다. 육상, 해상, 공중 모든 경로를 통제하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이 봉쇄로 인해 가자지구의 경제는 붕괴했고, 2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은 실업과 빈곤, 깨끗한 물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천장 없는 거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사 충돌을 벌였고, 그때마다 수많은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6. 현재와 미래: 벼랑 끝에 선 '두 국가 해법' 21세기 들어 평화 협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스라엘에서는 갈수록 강경한 우파 정권이 득세하며 정착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로 분열되어 통일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경: 팔레스타인은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독립 국가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주요 정착촌 블록을 자국 영토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가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정착촌: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에는 7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적 연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난민: 팔레스타인은 '나크바' 때 쫓겨난 난민과 그 후손들의 '귀환권'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는 국가의 유대적 정체성을 위협한다며 거부한다. 최근 몇 년간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가자지구에서는 주기적인 무력 충돌이 반복되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민들의 폭력과 이스라엘군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희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의 해법으로 여겨졌던 **'두 국가 해법'**은 계속되는 정착촌 확장과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성스러운 땅'에서 시작된 100년의 분쟁은 두 민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겼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평화는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있다. 국제 사회가 정의와 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하고 일관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약속의 땅'은 계속해서 절망과 비극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총성이 멎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정의에 기반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기획특집
    • 국제이슈
    2025-08-23
  • 발칸의 피바람, 유고 인종청소
    냉전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화합의 서사가 전 세계를 뒤덮던 1990년대, 발칸반도는 역사의 퇴보를 증명하듯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특정 민족과 문화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이 섬뜩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집단 학살, 강간, 추방의 광풍을 불러왔다. '남슬라브인의 땅'이라는 이상적 이름으로 탄생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어째서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는가. 오늘일보 기획특집 '5분 세계사 이슈 100선' 첫 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부터 피로 얼룩진 진행 과정,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발칸반도에 깊은 상흔으로 남은 결과와 과제를 알아본다. 1. 불안한 공존: 봉합되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을 단지 한 독재자의 광기나 순간의 정치적 격변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종교, 이념의 복잡한 갈등에 맞닿아 있다. 본래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보스니아인(이슬람), 슬로베니아인(가톨릭), 몬테네그로인(세르비아 정교),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정교) 등은 같은 남슬라브계라는 언어적 공통점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뚜렷한 개별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국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민족, 여섯 개의 공화국'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대한 타 민족의 불만을 낳으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갈등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려놓았다.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 '우스타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인 '체트니크'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다민족 연합의 파르티잔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한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통일(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눌렀다. 그는 각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여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민족주의적 발언이나 활동을 엄격히 처벌하며 갈등을 수면 아래로 잠재웠다. 그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간 외형적인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강력한 힘에 의한 '억압된 평화'였다. 2. 판도라의 상자: 민족주의의 망령이 깨어나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35년간 통치했던 '구심점' 티토가 사망하자 억눌려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8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고, 이는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하며 민족 갈등을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난한 남부 공화국,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89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열린 '가지메스탄 전투 6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전투와 마주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노골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 민족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타 민족(특히 알바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밀로셰비치의 선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1990년 각 공화국에서 실시된 다당제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발칸반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3. 지옥의 연대기: '인종청소'의 참혹한 전개 유고 내전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여 민족적으로 단일한 공간을 만들려는 '인종청소'가 전쟁의 핵심 전략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 - 크로아티아 전쟁 (1991-1995):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코바르, 두브로브니크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무차별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과 추방을 자행했다. -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인종청소가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된 곳은 '작은 유고슬라비아'라 불릴 만큼 다민족이 섞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라도반 카라지치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 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보스니아인(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 강간, 추방하여 세르비아인만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425일간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시민들은 저격과 포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포차, 비셰그라드 등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준군사조직이 보스니아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수용소'로 끌고 가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다.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이곳에 피신해 있던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 남성과 소년들을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었다. - 코소보 전쟁 (1998-1999): 보스니아 전쟁이 데이턴 협정으로 봉합된 후, 갈등의 무대는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 자치주로 옮겨갔다. 주민의 90%가 알바니아계였던 코소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밀로셰비치 정권은 '테러리스트 소탕'을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말발굽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 아래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 참상은 결국 NATO의 78일간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불러왔고, 전쟁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 상흔과 과제: 끝나지 않은 비극 10년에 걸친 전쟁과 인종청소는 발칸반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불신이었다. 한때 이웃으로 살았던 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끔찍한 기억은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국제 사회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하여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등 전쟁 범죄의 핵심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법적인 청산이 역사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의 복잡한 연방 체제 속에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와 국제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역사관을 고수하며,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화해는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민족주의라는 망령과 결합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발칸반도가, 그리고 인류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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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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