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m 청동 동상, 군 수뇌부 반대로 40년 떠돌다 마침내 대법원 앞 안착
- 무죄 추정 원칙 무너진 사법 참사, 1894년 간첩 누명 후 12년 만에 복권

프랑스 정부가 19세기 말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투옥됐던 유대계 프랑스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무죄 판결 120주년을 맞아, 12일(현지시간) 파리 파기원(대법원) 앞 광장에서 역사상 첫 국가 기념식을 거행하고 그의 청동 동상을 영구 설치했다.
40년 만에 제자리 찾은 동상
섭씨 28도를 웃도는 맑은 날씨 속 파리 중심부 대법원 앞 광장. 무장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 12일 오후 기념식이 열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와 드레퓌스의 손자 샤를 드레퓌스(99) 등 유족이 참석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날 제막된 높이 3.5m의 드레퓌스 청동 동상은 1985년 조각가 루이 미텔베르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애초 군사 교육기관인 에콜 밀리테르 안뜰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군 수뇌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약 40년간 파리 곳곳을 떠돌아야 했다. 결국 1906년 7월 12일 그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던 대법원 앞이 영구 안식처로 결정됐다.
샤를 드레퓌스는 현장에서 "조부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보게 되어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전한 갈등… 기념식 직전 테러 위협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국가적 경계를 강하게 주문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은 1906년 대법원 판결과 군 복직으로 끝난 역사가 아니다"라며 "반유대주의라는 오래된 악령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는 앞서 지난해 7월 12일을 드레퓌스 무죄를 기리는 국가 기념일로 공식 지정한 바 있다.
하지만 국가적 추모 분위기 이면에서는 이념적, 종교적 갈등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념식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파리 북부 외곽 사르셀(Sarcelles)의 유대교 회당 인근에서 군사용 무기가 실린 의심 차량이 발견된 것이다.
현지 경찰은 즉각 반경 내 주민 300여 명을 긴급 대피시켰고, 대테러 검찰청이 정식 수사에 착수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테러당국 관계자는 "국가 기념일에 맞춰 유대계 시설을 겨냥한 계획적 테러 시도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 중"이라고 전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특정 종교나 출신 성분이 개인을 맹목적인 여론재판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근대적 사법 참사다. 양측의 진영 논리가 팩트를 압도했던 당시의 갈등 양상은, 가짜 뉴스와 확증 편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0년이 지난 지금 동상이 대법원 앞에 섰다는 것은, 사법부가 여론과 정치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 오직 법리와 증거(Fact)만으로 판결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과 사법 정의의 현주소
1894년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반유대주의 여론에 휩쓸려 독일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명백한 증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의 방어권과 무죄 추정의 원칙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후 정보국장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조사로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군사법원은 체면을 위해 이를 은폐하려 했다. 사건의 진상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자, 프랑스 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드레퓌스파'와 국가 안보 및 군의 권위를 우선시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나뉘어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결국 12년의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1906년에 이르러서야 대법원의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와 복권이 이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