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8-23(토)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정치경제 검색결과

  • 실거주 안한 외국인 수도권 주택 매입 제한, 집쇼핑 못해
    실거주하지 않는 외국인은 서울과 경기, 인천의 주택 매입이 불가능해진다. 국토교통부는 21일 이 같은 내용의 외국인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정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국세청·금융정보분석원(FIU)과 합동으로 서울시 전역, 경기도 23개 시·군, 인천 7개 구를 외국인 토허구역으로 지정하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외국인이 이들 지역 내 토지 면적 6㎡ 이상의 주택(단독·다가구·연립·다세대주택 및 아파트)을 매수하려면 관할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허가받아야 하고, 허가일로부터 4개월 이내 입주 및 2년 실거주를 해야 한다. 국토부에 따르면 수도권의 외국인 주택 거래는 2022년 4천568건, 2023년 6천363건, 지난해 7천296건으로 2022년 이래 연평균 약 26%의 증가율을 보였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까지 4천431건으로 집계돼 3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 3월 19일 강남권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용산구의 아파트가 토허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해당 지역 외국인 주택 거래는 감소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서울시 전체적으로는 지난 5월 107건, 6월 124건, 7월 135건 등으로 다시 외국인 주택 거래량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외국인의 수도권 주택 거래는 경기 62%, 인천 20%, 서울 18%의 순으로 서울뿐 아니라 경기·인천의 거래량도 상당한 수준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인과 미국인이 각각 73%, 14%를 차지했고, 주택 유형별로는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각각 59%, 33%였다. 아울러 수도권에서 위탁관리지정 주택 거래도 지난해 295건에 달했다. 국내에 거소·주소를 두지 않는 비거주 외국인은 국내 주택을 매입하는 경우 위탁관리인을 지정해 신고해야 한다. 2023년 8월에 이 제도가 도입된 이래 위탁관리인을 지정한 수도권 거래는 497건으로 미국인과 중국인이 각각 64%(316건), 22%(110건)를 차지했다. 정부가 이날 수도권 대부분을 외국인 토허구역으로 지정한 것은 초강력 부동산 금융 규제로 꼽히는 6·27대책 이후 내국인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다주택자 중과세 등 여러 규제를 받는 내국인과 달리, 외국인은 이런 장벽 없이 국내 부동산을 취득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러나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 이내로 제한한 6·27 대책 이후 역차별 논란은 더욱 커졌다. 6·27 대책으로 수도권의 주택 거래가 급감했지만, 외국인은 규제 대상에서 빠져 외려 거래가 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은 자국의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을 때 주택담보대출 비율(LTV), 총부채원리금 상환 비율(DSR) 등을 적용받지 않는다. 6·27대책에서 정한 한도 6억원 역시 적용받지 않았다. 또 외국인의 경우 해외 부동산 소유 여부를 알 수 없어 다주택자에게 부과하는 취득세·양도소득세 중과도 피할 수 있다. 투기과열지구나 토허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주택담보대출에 따른 실거주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 정부의 대책 발표로 외국인 투기 수요 유입과 시장 교란 행위가 대부분 차단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외국인의 주택 매입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부 외국인, 특히 중국인들의 국내 아파트 매입이 급증하면서 투기성 매입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외국인의 국내 아파트 매입 건수는 2020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그중 70% 이상이 중국 국적자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인 매수자들은 서울 강남구, 용산구 등 고가 아파트와 함께 경기도 수원, 부천 등 수도권 외곽 지역의 신축 아파트에 대한 매입 비중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서울의 핵심 지역 아파트는 투자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고, 수도권 외곽의 신축 아파트는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매입하여 시세 차익을 노리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외국인의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실수요자 중심의 주택 시장을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외화 유입 감소 등 부작용을 우려하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와같은 외국인의 부동산 투자에 대해서 첫째, 다수의 외국인 주택 소유자들이 실제로 국내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주택을 보유하고 있어, 실수요자들의 주택난을 가중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둘째, 일부 지역에서는 외국인 매수자들이 국내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가격을 끌어올려, '묻지마 투자'식 투기가 성행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셋째, 국내 거주자들은 다주택자 규제, 대출 규제 등 강력한 부동산 정책을 적용받는 반면, 외국인들은 이러한 규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형평성 논란이 있었다.
    • 정치경제
    • 경제
    2025-08-23

국제/중국 검색결과

  • 꺼지지 않는 동토의 불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별군사작전'을 선언하며 시작된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느덧 3년 차(2025년 8월 기준)에 접어들었다. 당초 수일 내 수도 키이우(러시아명 키예프)가 함락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과 서방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동남부 전선을 중심으로 한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졌다. 지난 3년간 수십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전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에너지·식량 위기, 신냉전 구도 고착화 등 전 지구적 파장을 낳고 있다. 오늘일보 국제이슈 기획 다섯 번째 시리즈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부터 참혹한 전쟁의 경과, 그리고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과 향후 전망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제1부: 천 년의 애증, '키예프 루스'에서 갈라선 형제의 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 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나라의 뿌리는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Kievan Rus')'**에 닿아있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면서 두 민족의 운명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러시아가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 반면, 우크라이나 지역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문화는 '소(小)러시아'의 방언과 풍습으로 폄하되며 억압받았다. 소련 시절의 상처는 더욱 깊다. 1930년대 스탈린의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홀로도모르(Holodomor, 대기근)'**가 발생,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을 겪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를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닌, 민족 말살을 위한 '의도된 학살'로 기억하며 러시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마침내 독립 국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안에 두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동부·남부 지역과 흑해 함대의 전략적 기지가 있는 크림반도는 갈등의 잠재적 뇌관으로 남았다. 제2부: 운명의 갈림길, 2014년 유로마이단과 크림반도 합병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친(親)러시아와 친(親)서방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분기점이 된 사건이 바로 2014년 유로마이단(Euromaidan) 혁명이다. 2013년 11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협력 협정 체결을 중단하고 러시아로부터 150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수도 키이우의 독립광장(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해를 넘겨 이어졌고, 2014년 2월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축출되었고, 의회는 그를 탄핵한 뒤 친서방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러시아는 이를 서방이 배후에서 조종한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녹색 군인들(little green men)'이 크림반도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 가운데, 러시아의 비호 아래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러시아 귀속이 결정되었다. 2014년 3월 1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에서도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이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며 내전을 부추겼고, 이후 8년간 이어진 돈바스 전쟁으로 1만 4천여 명이 사망했다. 2014년의 이 일련의 사태는 우크라이나 영토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으며, 2022년 전면전의 서막이었다. 제3부: '특별군사작전', 21세기 유럽 최악의 전쟁 발발 8년간의 돈바스 내전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움직임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토의 동진(東進)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한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더 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 보장을 요구했으나, 미국과 서방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2022년 2월 24일 새벽,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탈나치화'를 명분으로 전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북쪽(벨라루스 경유), 동쪽(돈바스), 남쪽(크림반도) 세 방향에서 수도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우크라이나 군과 국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서방의 신속하고 대대적인 군사 지원이 더해지면서 러시아의 '단기 섬멸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키이우 함락에 실패한 러시아군은 4월 초 수도권에서 퇴각한 뒤, 전쟁 목표를 동부 돈바스 지역 전체와 남부 해안지대의 완전한 장악으로 수정했다. 이후 전쟁은 마리우폴, 세베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 등 동남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포격과 시가전이 반복되는 참혹한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리우폴에서는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가을,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와 헤르손 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에 성공하며 점령지를 일부 탈환했으나, 2023년 이후 러시아군이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에 막혀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현재 양측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참호선을 사이에 두고 드론, 포격,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는 1차 세계대전식의 지리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제4부: 전 지구를 덮친 전쟁의 그림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두 나라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에 심각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1) 에너지·식량 위기 세계적인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맞물리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특히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으며, 이는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세계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흑해 봉쇄로 막히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 아프리카와 중동의 저개발 국가들을 중심으로 식량 위기가 심화되었다. 2) 신냉전 구도 고착화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가 선명해졌다. 러시아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낀 핀란드와 스웨덴은 오랜 군사적 중립 노선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며 나토의 결속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반면,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삼가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서방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국제 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유엔 등 기존의 국제기구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3) 국제 질서의 재편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이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이 강대국에 의해 무력으로 훼손되면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이 부활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대만 해협, 남중국해, 한반도 등 다른 분쟁 지역에도 잠재적인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함께, 북한의 도발 및 북-러 군사 협력 강화라는 안보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5부: 안갯속의 출구, 끝나지 않은 전쟁의 미래 전쟁 3년 차에 접어든 현재,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에 평화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크라이나: 1991년 국경선 기준으로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에서의 러시아군 완전 철수와 전쟁 범죄자 처벌, 그리고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를 일부라도 포기하는 것은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러시아: 점령지(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주와 크림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 및 중립국화를 요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게 있어 전쟁의 패배는 곧 정치적 생명의 끝을 의미하기에 쉽게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만, 어느 하나도 쉬운 길은 아니다. 장기 소모전 지속: 현재와 같은 교착 상태가 수년간 더 이어지는 시나리오. 양국의 인적, 물적 손실이 극대화되지만,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가장 비극적인 전망이다. 휴전을 통한 '동결 분쟁'화: 양측이 소모전에 지쳐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에 합의하는 시나리오. 이는 한반도와 같이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은 '얼어붙은 분쟁(Frozen Conflict)'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언제든 다시 충돌할 수 있는 불안정한 평화가 될 것이다. 내부 변수에 의한 급격한 종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급격한 정치적 변화(정권 붕괴, 쿠데타 등)가 발생하거나, 서방의 지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등의 변수로 인해 전쟁이 예상치 못하게 끝나는 시나리오. 결론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 국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다. 이 전쟁의 종식은 단순히 포성과 총성이 멎는 것을 넘어, 파괴된 도시의 재건, 수많은 난민의 귀환, 그리고 무엇보다 깊게 파인 증오와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나긴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아닌 대화와 외교, 그리고 국제법의 원칙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이 동토의 비극을 주시하고 있다.
    • 국제/중국
    • 10분 국제이슈
    2025-08-23
  • 히말라야의 그림자, 중국-인도 국경 분쟁
    21세기 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좌우할 두 거인, 중국과 인도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을 사이에 두고 수십 년째 이어온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1962년 발발했던 국경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으며, 최근 몇 년간 발생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며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듯한 움직임도 있으나, 국경 지대에 증강 배치된 수만 명의 병력과 끊임없이 확장되는 군사 인프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오늘일보 국제이슈 기획 네 번째 시리즈에서는 중-인 국경 분쟁의 역사적 뿌리부터 최근의 군사적 대치 상황, 그리고 이 갈등이 동북아를 넘어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장까지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제1부: 역사의 덧칠, 분쟁의 씨앗이 된 '선' 중국과 인도가 맞댄 국경은 약 3,488km에 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국이 공식적으로 합의한 국경선은 단 한 뼘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 그어진 두 개의 경계선, 즉 '존슨 라인(Johnson Line)'과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에서 비롯됐다. 서부 국경의 분쟁지인 아크사이친(Aksai Chin) 고원은 존슨 라인과 관련이 깊다. 1865년 영국 측량사 윌리엄 존슨이 제안한 이 경계선은 아크사이친을 당시 잠무-카슈미르 왕국의 영토로 포함시켰다. 인도는 이를 계승하여 아크사이친이 자국령 라다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청나라 시대부터 실효적으로 지배해왔으며, 영국이 제안한 또 다른 경계선인 '매카트니-맥도널드 라인'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1950년대 인도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이곳에 신장과 티베트를 잇는 전략 도로(G219 국도)를 건설하며 실효 지배를 굳혔다. 동부 국경의 핵심 분쟁지는 인도가 실효 지배 중인 아루나찰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주다. 이곳의 경계는 1914년 영국, 티베트, 중국 대표가 모인 심라 회의에서 영국 측 대표였던 헨리 맥마흔이 제안한 '맥마흔 라인'을 따른다. 인도는 이 조약을 근거로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지만, 중국은 당시 티베트가 독립적인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중앙 정부의 최종 승인이 없었다는 이유로 맥마흔 라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 지역을 '짱난(藏南, 남티베트)'이라 부르며 약 9만㎢에 달하는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불분명하고 상호 인정되지 않은 국경선은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악화된 양국 관계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1962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크사이친과 동부 국경 전역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며 **중-인 전쟁(Sino-Indian War)**이 발발했다. 한 달여간의 전쟁에서 인도는 참패했고, 중국은 아크사이친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다. 이 전쟁은 인도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중국에게는 '인도의 팽창주의에 대한 응징'으로 기억되며 양국 국민의 가슴에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남겼다. 제2부: 총성 없는 전쟁, 21세기 국경 대치의 새로운 양상 1962년 전쟁 이후에도 국경에서의 긴장은 계속됐다. 1967년 시킴 국경의 나투 라(Nathu La)와 초 라(Cho La)에서 포격전이 벌어졌고, 1975년에는 아루나찰프라데시 툴룽 라(Tulung La)에서 매복 공격으로 인도군 4명이 사망하는 등 유혈 사태가 이어졌다. 이후 양국은 국경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며 1993년 '실질통제선(Line of Actual Control, LAC) 평화 및 안정 유지 협정'을 체결하는 등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 협정은 국경 지역에서 총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 발생하는 충돌이 주먹과 몽둥이, 돌 등이 동원되는 원시적인 '난투극'의 양상을 띠게 된 배경이 되었다.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들어 양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 인프라 건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충돌은 더욱 잦고 격렬해졌다. 1) 2017년 도클람 대치 (Doklam Standoff) 2017년 6월,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중국군이 인도-중국-부탄 3국의 국경이 만나는 도클람(중국명 둥랑, 洞朗) 고원에서 도로 건설을 시작하자, 부탄의 요청을 받은 인도군이 이를 저지하면서 73일간의 군사적 대치가 시작됐다. 도클람은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실리구리 회랑(Siliguri Corridor)'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폭이 20km에 불과해 '닭의 목'으로 불리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 7개 주를 잇는 유일한 통로다. 중국이 도클람에 도로를 건설할 경우, 유사시 인도 북동부 지역이 본토와 단절될 수 있다는 안보적 위기감이 인도군의 개입을 불렀다. 양국은 수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일촉즉발의 상황을 이어가다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앞두고 양국 군 동시 철수에 합의하며 대치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2) 2020년 갈완 계곡 충돌 (Galwan Valley Clash) 2020년 6월 15일 밤, 서부 국경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에서 양국 군 사이에 1975년 이후 45년 만에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인도 측이 실질통제선(LAC) 인근에 건설한 도로와 다리에 중국군이 이의를 제기하며 텐트를 설치하자, 이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총기 대신 못이 박힌 몽둥이와 돌, 주먹이 오가는 난투극 끝에 인도군 20명이 사망하고 중국군에서도 최소 4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인도 전역에 거대한 반중(反中)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양국 관계는 1962년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갈완 충돌 이후 양국은 국경 지대에 각각 5만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탱크, 전투기, 미사일 등 중화기를 전진 배치하며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제3부: 히말라야의 군비 경쟁 - 도로, 공항, 그리고 병력 갈완 충돌 이후, 중국과 인도는 국경 지대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으며 인프라 건설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병력 배치를 넘어, 유사시 신속한 병력과 물자 수송, 그리고 장기적인 주둔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 조치다. 중국: 중국은 '서부대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티베트 자치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철도와 도로, 공항 등 군사적으로 전용 가능한 인프라를 수십 년간 꾸준히 건설해왔다. 특히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와 국경 지역을 잇는 도로망과 칭짱철도는 대규모 병력과 보급품을 히말라야 고산지대로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대동맥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국경 인근에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하고 기존 공항 시설을 확장하며 공군력을 강화하는 한편, 국경 마을을 '샤오캉(小康)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요새화하여 민간인 거주와 군사적 전초기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인도: 과거 중국에 비해 국경 인프라 개발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도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 집권 이후 국경도로기구(BRO)를 중심으로 도로, 교량, 터널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갈완 충돌 이후에는 라다크 지역과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중심으로 모든 기상 조건에서 병력 이동이 가능한 도로망 확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인도는 또한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미국제 M777 초경량 곡사포와 아파치 공격헬기 등 최신 무기를 국경 지대에 집중 배치하며 중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1만 명에 더해 1만 명의 추가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하기로 결정하는 등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군비 경쟁과 인프라 확충은 국경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드는 '안보 딜레마'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쪽의 방어적 조치가 다른 쪽에는 공격적 위협으로 인식되어 연쇄적인 군비 증강을 촉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지정학적 파장 - 미-중 대립의 또 다른 전선 중-인 국경 분쟁은 단순히 두 나라 간의 영토 문제를 넘어, 인도-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갈완 충돌 이후 인도는 전통적인 '비동맹'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급격히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일본, 호주와 함께하는 4개국 안보 협의체 **쿼드(Quad)**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는 쿼드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 기술 이전과 정보 공유 등 실질적인 지원을 얻고 있다. 미국 역시 인도를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핵심 파트너로 보고,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 관계를 격상시키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이러한 행보를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판 나토'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중국을 포위하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중국의 싱크탱크들은 인도의 외교 정책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미국을 등에 업고 국경에서 더욱 대담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중-인 국경 분쟁은 미-중 전략 경쟁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갈등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편, 중국은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등 인도의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인도를 압박하는 '진주 목걸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인도는 '동방 정책(Act East Policy)'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해군력을 증강하며 인도양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5부: 갈등과 협력 사이, 위태로운 미래 최근 중-인 관계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협력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고 있다. 2024년 10월, 양국은 국경 지역에서의 단계적 병력 철수와 순찰로의 전환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며, 2025년 8월에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2020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경 무역과 직항 항공편 운항을 5년 만에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양국 모두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원치 않으며, 세계 1, 2위의 인구 대국이자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진 양국 관계의 완전한 파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 노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빙 무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신뢰의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인도는 국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중국은 국경 문제를 양자 관계의 일부로 국한하고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의 협력을 우선시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근본적인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중-인 국경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망한다. 양국 모두에게 국경 문제는 영토 주권을 넘어 국가적 자존심과 국내 정치적 지지 확보와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면전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더라도, 국경에서의 군사적 대치와 우발적 충돌의 위험은 상존할 것으로 보인다. 국경 지대에 수만 명의 병력이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작은 오판이나 우발적 사건이 언제든 대규모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살얼음판'과 같다. 히말라야의 눈 덮인 봉우리에 드리운 용과 호랑이의 그림자는 21세기 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지정학적 리스크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자들이 갈등의 확산을 막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 국제/중국
    • 10분 국제이슈
    2025-08-23
  • ‘피로 그은 국경선’, 78년의 증오: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1947년 8월, 대영제국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불렸던 인도는 20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감격적인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파티션(Partition, 분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비극이 인도 아대륙을 덮쳤다.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유혈 사태와 난민 행렬이 발생했다. 하나의 문명권을 공유했던 형제들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총칼을 겨눴고, 그날의 상처는 7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물지 않은 채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었다. 특히 양국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슈미르’라는 분쟁의 핵이 언제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게 한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세 번째 편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두 적대적 형제의 탄생과 끝나지 않는 갈등의 역사를 10,000자 분량으로 심층 분석한다. 1. 분할의 씨앗: 영국의 '분할 통치'와 종교 갈등의 격화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 식민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백 년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해왔던 인도 아대륙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식민 통치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기존 사회적, 종교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인도인들의 단합된 저항을 막으려 했다. 1905년 벵골 분할령이 대표적인 예다. 영국은 행정 효율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서벵골과 무슬림이 다수인 동벵골로 나누어 양측의 종교적 대립을 격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인도 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는 종교를 초월한 세속적이고 단일한 인도를 지향했다.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 지도자들은 모든 인도인이 종교와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에서 힌두 민족주의 색채가 점차 강화되자, 무슬림 지도자들은 정치적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권익이 다수파인 힌두교도에 의해 침해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All-India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초기 무슬림연맹은 무슬림의 권익 보호를 목표로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분리주의 노선으로 기울었다. 변호사 출신의 냉철한 정치가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무슬림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분리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는 힌두교와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회 질서와 문화를 가진 '두 개의 민족(Two-Nation Theory)'이며, 따라서 무슬림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통치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진나의 '파키스탄(순수한 자들의 땅)' 구상은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 피로 그은 국경선: 1947년 '파티션'의 비극 1947년,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 마운트배튼은 영국의 조속한 철수를 목표로 인도 분할을 기정사실화했다. 인도의 분할 방식과 국경선을 결정하는 임무는 영국의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에게 맡겨졌다. 인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했던 그는 낡은 지도와 인구 통계 자료에만 의존해 불과 5주 만에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래드클리프 라인)을 급조했다. 이 국경선은 수백 년간 함께 살아온 마을과 공동체, 심지어 한 가족의 집까지 하루아침에 갈라놓았다. 특히 무슬림, 힌두교도, 시크교도가 섞여 살던 펀자브와 벵골 지역의 분할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1947년 8월 14일 파키스탄이, 15일 인도가 각각 독립을 선포하자, 국경선 반대편에 살게 된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광기 어린 폭력이 인도 아대륙 전역을 휩쓸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무슬림을, 무슬림은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공격했다. 집단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이 자행되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사라졌다. 이 끔찍한 종교 폭동으로 인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약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에 맞는 국가를 찾아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비극적인 강제 이주였다. 기차는 양측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을 싣고 국경을 넘나들었고, '유령 열차'라 불리며 분할의 참상을 증언했다. 이 '파티션'의 상처와 증오는 독립 이후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원죄가 되었다. 3. '지상의 낙원'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카슈미르 분쟁 분할 과정에서 대부분의 번왕국(토후국)들은 종교 인구 구성에 따라 인도 혹은 파키스탄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아름다운 계곡 잠무-카슈미르는 예외였다. 이곳은 주민의 다수가 무슬림이었지만, 통치자인 마하라자(번왕)는 힌두교도인 하리 싱이었다. 그는 독립 국가로 남기를 원하며 귀속 결정을 미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파슈툰족 무장 부족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면서부터다. 다급해진 하리 싱은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인도는 카슈미르의 인도 귀속을 조건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규군이 개입하면서 양국 간의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8)**이 발발했다.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49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며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정된 **정전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을 기준으로 카슈미르는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전체의 약 2/3)와 파키스탄령 아자드-카슈미르(약 1/3)로 분할되었다. 유엔은 카슈미르의 최종 귀속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인도는 파키스탄군의 완전 철수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며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양국 간 갈등의 핵심이자 세 차례의 전면전과 수많은 국지전의 무대가 되었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파키스탄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무장 세력을 침투시켜 주민 봉기를 유도하려다 실패하면서 발발했다. 대규모 기갑전과 공중전이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소련의 중재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카르길 전쟁 (1999): 파키스탄군이 LoC를 넘어 인도 측 카르길 지역의 고지대를 점령하면서 발발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양국이 핵보유국이 된 이후 처음 벌어진 군사 충돌이라는 점에서 국제 사회의 큰 우려를 낳았다. 결국 파키스탄은 국제적 압력 속에 철수했고,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2019년,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헌법 제370조를 폐지하여 70년간 잠무-카슈미르에 부여되었던 특별 자치 지위를 박탈하고 중앙 정부의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 조치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하고 파키스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카슈미르의 긴장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오늘날에도 LoC를 따라 양국 군의 총격전과 테러리스트의 침투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4. 방글라데시의 탄생과 핵무장: 확전되는 갈등 양국의 갈등은 카슈미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71년, 분쟁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다시 한번 폭발했다. 독립 당시 파키스탄은 인도 아대륙을 사이에 두고 1,600km나 떨어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으로 구성된 기이한 형태의 국가였다. 언어, 인종, 문화가 전혀 다른 두 지역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하나만으로 묶여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던 서파키스탄은 벵골인이 대다수인 동파키스탄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정치적으로 억압했다. 1970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두자, 서파키스탄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벵골인이 학살당하고, 천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다. 인도는 이를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동파키스탄의 독립군을 지원하며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이것이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71)**이다. 전쟁은 단 13일 만에 인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파키스탄군은 항복했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로 탄생했다. 이 패배는 파키스탄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고, 인도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고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인도가 1974년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998년 5월, 인도가 두 번째 핵실험을 단행하자 파키스탄 역시 며칠 간격으로 핵실험을 실시하며 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로써 인도 아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분쟁 지대로 변모했다. 양측의 재래식 군사 충돌이 언제든 상대방의 오판을 불러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5. 끝나지 않는 대결: 테러리즘과 위태로운 평화 카르길 전쟁 이후 양국은 전면전을 피하는 대신,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파키스탄, 특히 군부와 정보기관(ISI)은 카슈미르의 분리주의 무장 단체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을 은밀히 지원하여 인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11월,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테러 조직 라슈카르에타이바가 인도의 경제 중심지 뭄바이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자행하여 166명이 사망한 사건은 양국 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이 외에도 인도 의회 테러(2001), 파탄코트 공군기지 테러(2016), 풀와마 자폭 테러(2019) 등 파키스탄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렸다. 물론 양국 관계에 평화를 위한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72년 심라 협정, 1999년 라호르 선언 등을 통해 양국 정상은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크리켓 외교, 버스 노선 개통 등 다양한 신뢰 구축 조치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시도는 번번이 대규모 테러나 국내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관계는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인도의 모디 정부는 강력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파키스탄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난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 78년 전 '파티션'의 광기 속에서 태어난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라는 비극적 공통점을 가진 두 형제 국가가 과거의 상처를 딛고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여전히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 국제/중국
    • 10분 국제이슈
    2025-08-23
  • 끝나지 않는 비극,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00년사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에 자리한 좁고 긴 땅. 유대인에게는 2000년 디아스포라의 종착점이자 신이 약속한 땅(Eretz Yisrael)이며,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수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Filastin)이다. 이 하나의 땅을 둘러싼 두 민족의 열망은 20세기를 관통하며 가장 해결하기 어렵고 폭력적인 분쟁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종교, 민족, 영토, 자원이 복잡하게 얽힌 이 갈등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 정치의 대리전이자 인류의 양심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늘일보 기획특집 두 번째 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적 씨앗부터 현재의 참상까지, 그 피와 눈물의 연대기를 알아본다. 1. 비극의 서막: 시오니즘과 영국의 이중 약속 오늘날 분쟁의 직접적인 뿌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시오니즘(Zionism)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전역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망을 키웠고, 그들의 시선은 성서에 기록된 고향, 팔레스타인을 향했다.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 Aliyah)를 촉진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미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은 승리를 위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약속을 남발하며 훗날 닥쳐올 재앙의 씨앗을 뿌렸다. 1915년, 영국은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와의 서신 교환(맥마흔 서한)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하면 전후 아랍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암시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917년, 영국은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유대인 금융 자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아서 밸푸어 외무장관은 시오니즘 지도자였던 로스차일드 경에게 서한(밸푸어 선언)을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이 선언에는 "기존 비(非)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의 정치적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자,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영국의 비호 아래 유대인 이주는 급증했고, 이들은 아랍인들의 토지를 사들이며 정착촌을 확장해 나갔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느끼며 저항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이민자들과 아랍 주민 간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었다. 영국은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못하는 모호한 정책으로 일관하며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2. '나크바'와 국가의 탄생: 1948년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자, 유대인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 동정 여론이 비등했다. 더 이상 갈등을 중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UN)**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 관리하에 둔다는 **결의안 181호(분할안)**를 채택했다. 당시 인구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던 유대인에게 전체 영토의 56%를 할당하는 이 안은 아랍 세계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외부 세력이 멋대로 나누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분할안을 수용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를 완료하자마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연맹 5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신생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쟁 기간과 그 전후, 7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학살의 공포를 피해 떠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아랍 측에 할당했던 영토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사건을 **'나크바(Al-Nakba, 대재앙)'**라고 부르며 민족사 최대의 비극으로 기억한다. 이 때 발생한 수많은 난민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및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난민촌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영토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요르단 합병)와 가자지구(이집트 통제)로 나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3. 6일 전쟁과 점령의 시대: 끝나지 않는 갈등의 심화 이후 중동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더 겪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선제공격하여 불과 6일 만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결과는 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특히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도시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수도'로 선포했다.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점령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군정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정착촌은 '두 국가 해법'의 가장 큰 물리적 장애물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핵심 원인이 되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점령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쟁에서의 연패를 통해 군사력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로운 저항의 길을 모색했다. 1964년 창설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지도 아래 무장 투쟁을 통해 국제 사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각인시켰다. 4. 인티파다와 오슬로 협정: 희망과 좌절의 교차 1987년, 이스라엘의 20년에 걸친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용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멩이를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에 맞섰다.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민중봉기)**로 불리는 이 저항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인티파다는 PLO의 위상을 높였고, 마침내 이스라엘과 PLO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다. 1993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양측은 비밀 협상 끝에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수립하여 5년간의 자치 기간을 거친 뒤 영구적 지위에 관한 협상을 개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두 국가 해법'의 첫걸음으로 여겨진 이 협정으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희망은 짧았다. 협정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았고, 예루살렘, 난민 귀환권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1995년 평화의 주역이었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열린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최종 합의에 실패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감은 극에 달했다. 얼마 뒤,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였던 아리엘 샤론이 무장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자살 폭탄 테러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군사 보복이 뒤엉키는 제2차 인티파다로 번졌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오슬로 협정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곳곳에 거대한 분리 장벽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더욱 고립시켰다. 5. 하마스의 부상과 가자지구: '천장 없는 감옥'의 비극 오슬로 협정의 실패는 팔레스타인 내부에 또 다른 균열을 낳았다. 협상을 통한 평화 노선에 회의를 느낀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이슬람 저항 운동 **하마스(Hamas)**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자국 정착촌과 군대를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예상을 깨고 압승을 거두자, 이스라엘과 서방 세계는 하마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 원조를 중단했다. 결국 2007년, 하마스는 온건파 파타(Fatah)와의 내전 끝에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봉쇄를 단행했다. 육상, 해상, 공중 모든 경로를 통제하며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이 봉쇄로 인해 가자지구의 경제는 붕괴했고, 200만 명이 넘는 주민들은 실업과 빈곤, 깨끗한 물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천장 없는 거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사 충돌을 벌였고, 그때마다 수많은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6. 현재와 미래: 벼랑 끝에 선 '두 국가 해법' 21세기 들어 평화 협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스라엘에서는 갈수록 강경한 우파 정권이 득세하며 정착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로 분열되어 통일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경: 팔레스타인은 1967년 6일 전쟁 이전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독립 국가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주요 정착촌 블록을 자국 영토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미래 국가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가 자국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정착촌: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에는 7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적 연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난민: 팔레스타인은 '나크바' 때 쫓겨난 난민과 그 후손들의 '귀환권'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는 국가의 유대적 정체성을 위협한다며 거부한다. 최근 몇 년간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다. 가자지구에서는 주기적인 무력 충돌이 반복되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고, 서안지구에서는 정착민들의 폭력과 이스라엘군의 강경 진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희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 사회의 해법으로 여겨졌던 **'두 국가 해법'**은 계속되는 정착촌 확장과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성스러운 땅'에서 시작된 100년의 분쟁은 두 민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겼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평화는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있다. 국제 사회가 정의와 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하고 일관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약속의 땅'은 계속해서 절망과 비극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총성이 멎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며, 정의에 기반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 국제/중국
    • 10분 국제이슈
    2025-08-23
  • 발칸의 피바람, 유고 인종청소
    냉전의 견고한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화합의 서사가 전 세계를 뒤덮던 1990년대, 발칸반도는 역사의 퇴보를 증명하듯 끔찍한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특정 민족과 문화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이 섬뜩한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 믿었던 집단 학살, 강간, 추방의 광풍을 불러왔다. '남슬라브인의 땅'이라는 이상적 이름으로 탄생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어째서 이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내렸는가. 오늘일보 기획특집 '5분 세계사 이슈 100선' 첫 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종청소라는 비극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배경부터 피로 얼룩진 진행 과정,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발칸반도에 깊은 상흔으로 남은 결과와 과제를 알아본다. 1. 불안한 공존: 봉합되었으나 아물지 않은 상처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을 단지 한 독재자의 광기나 순간의 정치적 격변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뿌리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민족, 종교, 이념의 복잡한 갈등에 맞닿아 있다. 본래 발칸반도는 동로마와 서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은 이 지역에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모자이크처럼 공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인(가톨릭), 보스니아인(이슬람), 슬로베니아인(가톨릭), 몬테네그로인(세르비아 정교),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정교) 등은 같은 남슬라브계라는 언어적 공통점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종교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뚜렷한 개별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국가, 세 개의 종교, 네 개의 언어, 다섯 개의 민족, 여섯 개의 공화국'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중심주의에 대한 타 민족의 불만을 낳으며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갈등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려놓았다.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 '우스타샤'는 나치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를 잔혹하게 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인 '체트니크' 역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혼란 속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다민족 연합의 파르티잔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사회주의 연방을 수립한 티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위를 바탕으로 '형제애와 통일(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모든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눌렀다. 그는 각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여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민족주의적 발언이나 활동을 엄격히 처벌하며 갈등을 수면 아래로 잠재웠다. 그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간 외형적인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강력한 힘에 의한 '억압된 평화'였다. 2. 판도라의 상자: 민족주의의 망령이 깨어나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를 35년간 통치했던 '구심점' 티토가 사망하자 억눌려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1980년대 내내 유고슬라비아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고, 이는 각 공화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하며 민족 갈등을 재점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가난한 남부 공화국,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세르비아 공산당 지도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89년 코소보 자치주에서 열린 '가지메스탄 전투 6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전투와 마주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노골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선동했다. 과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세르비아 민족의 영광을 상기시키고, 타 민족(특히 알바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밀로셰비치의 선동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1990년 각 공화국에서 실시된 다당제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공식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발칸반도는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3. 지옥의 연대기: '인종청소'의 참혹한 전개 유고 내전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특정 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여 민족적으로 단일한 공간을 만들려는 '인종청소'가 전쟁의 핵심 전략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졌다. - 크로아티아 전쟁 (1991-1995):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코바르, 두브로브니크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무차별 포격으로 파괴되었고, 양측 모두 민간인 학살과 추방을 자행했다. - 보스니아 전쟁 (1992-1995): 인종청소가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하게 자행된 곳은 '작은 유고슬라비아'라 불릴 만큼 다민족이 섞여 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라도반 카라지치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 인민군의 지원 하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보스니아인(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 강간, 추방하여 세르비아인만의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수도 사라예보는 1,425일간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시민들은 저격과 포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포차, 비셰그라드 등 동부 보스니아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준군사조직이 보스니아인 마을을 습격하여 남성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 수용소'로 끌고 가 조직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비극의 정점은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졌다.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이곳에 피신해 있던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 남성과 소년들을 불과 며칠 만에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었다. - 코소보 전쟁 (1998-1999): 보스니아 전쟁이 데이턴 협정으로 봉합된 후, 갈등의 무대는 세르비아 남부의 코소보 자치주로 옮겨갔다. 주민의 90%가 알바니아계였던 코소보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 해방군(KLA)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밀로셰비치 정권은 '테러리스트 소탕'을 명분으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대규모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말발굽 작전'으로 명명된 이 계획 아래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 참상은 결국 NATO의 78일간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불러왔고, 전쟁은 밀로셰비치 정권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 상흔과 과제: 끝나지 않은 비극 10년에 걸친 전쟁과 인종청소는 발칸반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사회 기반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리적인 피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불신이었다. 한때 이웃으로 살았던 이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끔찍한 기억은 공동체의 완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국제 사회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를 설립하여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믈라디치 등 전쟁 범죄의 핵심 책임자들을 단죄했다. 이는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법적인 청산이 역사의 완전한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의 복잡한 연방 체제 속에서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와 국제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각 민족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역사관을 고수하며,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화해는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극은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민족주의라는 망령과 결합했을 때, 인류가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발칸반도가, 그리고 인류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국제/중국
    • 10분 국제이슈
    2025-08-23
  • 시진핑, 티베트 전격 방문...27일 만에 공개행사 나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1일 중국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사시 포탈라 궁 앞 광장에서 열린 자치구 수립 60주년 경축대회에 참석했다. 시 주석이 공개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달 25일 신임 주중 대사들의 신임장을 제정받은 이후 27일 만이다. 2011년 부주석 시절 이후 14년 만에 이뤄진 이번 방문은 시 주석의 장기 집권과 맞물려 티베트 지역에 대한 통제와 개발을 동시에 강화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시 주석은 이번 방문에서 티베트의 빈곤 퇴치 성과를 치하하고,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티베트 문제 해결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 시 주석의 이번 티베트 방문은 단순히 지역 지도자들을 격려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국 공산당은 그동안 티베트를 '안정과 통제'라는 틀에서 관리해왔지만, 시 주석은 여기에 '경제 개발'과 '민족 동질성 강화'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추가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라싸의 포탈라궁 광장과 종교 시설을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만났다. 그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기 위해 티베트는 중요한 부분"이라며, "티베트의 모든 민족은 중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강조했다. 이는 서방 세계가 제기하는 티베트의 인권 및 종교 자유 문제에 대한 정면 반박이자, 중국 정부의 통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시 주석은 티베트 철도와 같은 인프라 건설을 통해 티베트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고,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경제적 번영을 통해 티베트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중국 본토와의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 티베트의 경제 발전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왔으며, 시 주석은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시 주석의 방문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중국의 티베트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경제 발전과 민족 화합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티베트인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티베트 내부의 일부 주민들은 경제적 혜택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투자로 티베트의 도로는 잘 정비되었고, 전력과 통신망이 확충되는 등 생활 수준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티베트인들은 전통 문화와 종교의 자유가 억압받고, 한족과의 문화적 충돌이 심화되는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고 있다. 이는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정체성 보존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티베트인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번 시 주석의 방문은 단순한 시찰을 넘어, 향후 티베트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신호탄이다. 중국 정부는 경제적 지원과 함께 티베트 분리주의 세력을 철저히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시 주석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고, 모든 분리주의 활동을 단호히 진압해야 한다"고 지시하며 공안 조직의 역할을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홍콩의 '일국양제'를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처럼, 티베트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임을 시사한다.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 문제 등 종교적 리더십에 대한 통제도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은 티베트 문제를 '통일과 안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관리하겠다는 최종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는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을 성공적인 '민족 화합'의 사례로 선전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경제적 발전이 티베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티베트의 역사는 중국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평화 해방’을 명분으로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가 과거부터 중국 영토의 일부였으며, 중앙 정부의 통치를 회복하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티베트를 해방시키기 위한 정당한 군사 작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티베트 망명 정부와 국제사회는 이를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에 대한 무력 침략으로 규정한다. 당시 티베트 정부는 항복을 선언하고 1951년 5월 중국과 ‘티베트 평화 해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이 협정은 티베트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명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티베트의 독립이 종식되고 중국에 복속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1959년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으나 중국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국제/중국
    • 정치
    2025-08-23
  • 캄차카반도에 8.7 초강진…환태평양 '불의 고리'의 경고인가
    30일(현지시간) 러시아 동부 캄차카반도 인근 해안에서 규모 8.7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의 영향으로 러시아 동부 해안도시의 일부 건물이 손상되고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사망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러시아 당국은 피해가 심한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30일 오전 8시 25분(현지시간) 러시아 캄차카반도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지진은 초기 규모 8.0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미국 지질조사국(USGS)과 일본 기상청 등에 의해 규모 8.7로 상향 조정됐다. 진앙은 러시아 캄차카반도 남동쪽 126~136km 떨어진 해역으로, 진원의 깊이는 19km로 비교적 얕게 관측되어 큰 피해가 우려됐다. 러시아 해안은 물론 일본 전역, 나아가 하와이와 한반도 동해안까지 쓰나미 경보를 발령하며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미국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PTWC)는 러시아와 일본에 최대 3m에 달하는 '위험한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일본 기상청은 즉각 홋카이도부터 규슈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전역에 쓰나미 경보 및 주의보를 내렸으며, 해안 지역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를 명령했다. 특히 홋카이도 해안에서는 이미 쓰나미가 관측되기 시작했으며, 높이는 지역에 따라 0.5m에서 최대 1m 이상을 기록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도 파괴적인 쓰나미가 예상된다며 해안 지역에 대피령을 내리는 등 광범위한 지역에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이번 지진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나, 일부 해안 도로가 폐쇄되는 등 재산 피해 조사는 진행 중이다. 한반도 동해안에는 0.3m 미만의 쓰나미가 예상되었으며, 오후 3시경 울릉도 주변 수위가 소폭 상승할 것으로 예보됐다. 이번 캄차카반도 강진은 지구의 가장 활발한 지진대이자 화산대인 '환태평양 조대(Ring of Fire)'에 위치한 캄차카반도의 특성상 예견된 지각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캄차카반도는 태평양판이 오호츠크판(또는 북아메리카판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함) 아래로 섭입하는 경계면에 위치하며, 이 섭입대에서는 거대한 지진 에너지가 축적되고 방출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특히 캄차카반도 남동쪽 해안과 쿠릴 열도를 따라 뻗어 있는 '쿠릴-캄차카 해구'는 태평양판이 오호츠크판 아래로 침강하는 대표적인 섭입대이다. 이러한 판의 움직임은 강력한 지진 활동과 화산 활동을 유발하며, 캄차카반도가 '불의 고리'의 일부로 불리는 이유이다. 지각판의 움직임으로 인한 응력 축적과 해소 과정에서 규모 8.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하는 것은 이 지역의 일반적인 지질학적 특징이다. 20세기에도 캄차카 해역에서는 여러 차례 규모 8.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바 있으며, 1952년에는 규모 9.0의 초강진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번 지진 역시 이와 같은 판 경계에서의 에너지 방출로 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진원의 깊이가 얕아 발생한 지진파의 에너지가 지표면과 해수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쓰나미 발생 가능성을 높였다.
    • 국제/중국
    • 국제
    2025-07-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