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지 않겠다" 문구와 결연한 군인 이미지로 대일 압박 수위 높여
- 양국 관계 냉각 심화…군사적 긴장 고조
중국 인민해방군이 난징대학살 88주기 추모일인 13일을 맞아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는 강경한 표현의 포스터 한 장을 공개하며 양국 간의 군사적·역사적 긴장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 동부전구는 이날 위챗 공식 계정에 '대도제'(大刀祭. 큰 칼 제사)라는 제목의 포스터를 게시하며 1937년 일본군에 의해 난징에서 주민 30만명이 학살됐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는 최근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와 대만 문제로 악화된 중일 관계에 더욱 냉각기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포스터 공개는 난징대학살 추모일을 계기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책임론을 부각하고, 현재 진행형인 양국 간의 군사적 대립 구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중국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난징대학살 추모일은 중국이 역사적 피해를 강조하고 대일 강경 노선을 다지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다. 중국 당국은 매년 이 날을 계기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내부 결속을 다져왔다.
최근 중국은 일본이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대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해상 및 공중 훈련을 강화하며 군사적 압박을 높이고 있다. 이번 포스터는 이러한 군사적 강경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민해방군(PLA)의 공식 소셜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개된 해당 포스터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시각적·언어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스터는 짙은 흑백 톤을 배경으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민해방군 군인의 상반신 모습을 중앙에 배치했다. 군복에 새겨진 붉은 오성(五星) 휘장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중국군의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미지와 함께 삽입된 문구는 "잊지 않겠다(勿忘)"와 "강군흥국(强軍興國)"이다. '잊지 않겠다'는 문구는 직접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며 일본을 겨냥한 복수심과 경계심을 강조한다. '강군흥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국가를 부흥시키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며, 대외적 위협에 군사력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번 포스터는 단순한 역사 교육의 차원을 넘어 현대 군사력이 동원된 대일 경고의 성격을 띠면서 양국 관계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은 아직 공식적인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으나, 이번 포스터가 대외적으로 '군사적 위협'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외교 채널을 통한 비공식적인 항의가 예상된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역사 문제와 안보 문제가 뒤섞여 중일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센카쿠열도 및 대만 해협 등 민감한 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 포스터에 대해 "난징대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군국주의에 반대한다는 경고의 의미"라고 해석했다.
인민해방군이 직접적으로 강경 포스터를 공개한 것은 내부적으로 시진핑 국가 주석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와 대외 강경 노선에 대한 지지를 결집하려는 의도로도 풀이된다.
※ 난징대학살(南京大屠殺, Nanking Massacre)은 1937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한 후 자행한 대규모 학살 및 전쟁 범죄를 일컫는 사건이다. 이 비극은 중국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상처이자, 현재까지도 중일 관계의 핵심 갈등 요인으로 남아 있다.
Ⅰ. 사건 발생 배경: 중일전쟁의 확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전면화된 후, 일본군은 중국의 핵심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이자 정치·경제적 중심지였던 난징으로 진격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의 진격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일본군에 의해 1937년 12월 13일 난징성이 함락되었다. 국민당 정부의 주요 인물들과 군대는 난징을 버리고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겼다.
Ⅱ. 잔혹한 학살과 전쟁 범죄의 개요
난징이 함락된 직후부터 약 6주 동안(1937년 12월 13일 ~ 1938년 1월 말) 일본군 제6사단, 제114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적이고 무차별적인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총살, 생매장, 칼을 이용한 참수 등 극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대규모의 성폭력 범죄가 조직적으로 발생했다. 수많은 중국인 여성이 강간당하고 살해되었으며, 일본군은 난징 시내의 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서양인으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는 전쟁의 참상을 막기 위해 난징에 안전지대(Safety Zone)를 설정하고 중국인 피난민 수십만 명을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안전지대 내부로까지 진입하여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난징대학살의 정확한 피해자 수는 현재까지도 중일 양국 간의 뜨거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중국 측 주장: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로 인해 3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난징에는 '30만 동포 희생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도쿄 전범 재판 결과: 1946년 극동 국제 군사재판(도쿄 전범 재판)에서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20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판결했다.
일본 극우의 역사 왜곡: 일본의 일부 극우 세력과 정치인들은 난징대학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피해 규모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지속하며 중국 및 국제 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Ⅳ. 역사적 의미와 현재의 중일 관계
난징대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잔혹한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역사적 근거이며, 중국의 민족 정체성 및 대일 외교 정책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일본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고, 일부 지도층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의 행보를 보일 때마다, 난징대학살의 기억은 소환되어 중일 관계를 경색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