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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멜로 영화의 영원한 클래식,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 한마디로 대한민국 모든 남녀의 심장을 후벼 팠던 그 작품.
단순히 '헤어지는 이야기'로만 보면 곤란하다. 이건 사랑이라는 계절이 우리 삶을 어떻게 관통하고, 그 흔적이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에 대한 아주 우아한 인문학적 보고서이다.
소리가 머문 자리에 사랑이 깃들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되고, 그 목소리가 심장을 울리는 '사랑'이 되는 순간은 흔치 않아. 2001년 가을, 허진호 감독이 내놓은 이 영화는 '소리'라는 매질을 통해 사랑이 어떻게 우리 곁에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지를 보여준 한국 멜로의 최고봉이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세상을 소리로 기억하는 남자야. 그런 그에게 강릉 방송국 PD 은수(이영애)가 나타나지.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소리 여행' 기획을 위해서 말이야. 이들의 만남은 눈이 시리게 하얀 겨울 산사에서 시작돼.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 처마 끝에 걸린 풍경 소리... 상우는 그 소리들을 녹음기에 담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엔 은수라는 여자의 존재가 더 깊게 녹음되고 있었어.
라면처럼 뜨거웠다 김치처럼 쉬어버린 계절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완만해 보이지만, 그 속엔 인간의 감정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격동이 담겨 있어.
① "라면 먹을래요?" - 유혹의 기술 혹은 시작의 설렘
두 사람의 만남은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겨울 산사에서 시작돼. 두 사람은 강원도의 절경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채집한다. 상우는 소리 하나를 따기 위해 눈밭에 몸을 던지고, 은수가 추울까 봐 자신의 점퍼를 건네는 투박한 청년이지. 반면 은수는 세련됐지만 어딘가 속을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지.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어.
어느 날 밤, 상우를 배웅하던 은수가 툭 던져. "라면 먹을래요?" 이 말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업 멘트가 됐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해. 라면은 금방 끓여서 뜨겁게 먹고 금방 치울 수 있는 음식이지. 은수에게 사랑은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상우는 그 라면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버려. 그날 밤, 두 사람은 은수의 아파트에서 함께 잠들며 연인이 되지.
② "내가 그렇게 만만해?" - 균열의 시작
봄이 오고, 두 사람의 사랑은 절정에 달해. 상우는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도 마다하지 않아. 밤새 운전해서 은수를 보고, 새벽같이 다시 출근하는 무모함. 그건 사랑이 주는 마법 같은 에너지지. 하지만 은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가.
은수는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야. 그녀는 사랑의 끝을 이미 본 적이 있지. 그래서 상우가 "우리 할머니 만나볼래?"라며 관계를 공식화하고 구속하려 들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쳐. "나 일 때문에 바빠." "내가 그렇게 만만해? 왜 자꾸 귀찮게 해?" 은수의 말은 상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상우는 이해할 수 없었어. 사랑한다면서 왜 같이 있는 게 귀찮은 건지, 왜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건지.
③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불멸의 대사
결국 은수는 이별을 선언해. 상우는 은수의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다 묻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질문은 상우가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절규야. 하지만 은수는 아주 담담하게, 아니 차갑게 답해. "헤어지자."
상우의 이별 앓이는 처절해. 은수의 차를 열쇠로 긁어놓는 지질한 복수를 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전화를 걸기도 해. 은수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의 그 무너지는 표정... 배우 유지태의 넓은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었지.
④ "하늘은 하얗다" -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시간이 흘러 다시 봄이 왔어. 상우는 그사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과정을 지켜보며 '영원한 기다림'이 얼마나 덧없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깨달아. 할머니는 평생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사셨거든. 상우는 할머니의 옷을 정리하며, 자신의 마음속 은수도 정리하기 시작해.
어느 날, 은수가 다시 상우를 찾아와. 화분을 하나 들고 "우리 다시 만날까?"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상우는 이제 알아. 한 번 어긋난 소리는 다시 조율하기 어렵다는 걸. 그는 은수의 손을 잡았다가 조용히 놓아줘.
은수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상우는 보리밭 한복판에서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들어. 이제 그의 녹음기엔 은수의 목소리가 아닌, 자연의 변함없는 소리가 담기고 있었어.
이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왜 여전히 회자될까? 그건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상우'였기 때문이야.
시간의 비가역성 : 사랑은 흐르는 물과 같아. 한 번 지나간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듯이, 어제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은 같을 수 없지. 은수는 그 진리를 너무 빨리 알았고, 상우는 너무 늦게 받아들였을 뿐이야.
소리와 기억 : 소리는 녹음되는 순간 과거가 돼. 상우가 채집하는 그 찰나의 소리처럼, 사랑의 환희도 찰나에 불과해. 영화는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덧없음'의 미학을 극대화하지.
김치의 미학 : 영화 속 상우의 아버지는 며느리 없는 집에서 묵묵히 김치를 담가. 김치는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지. 상우의 사랑은 김치처럼 깊고 오래가는 것을 지향했지만, 은수의 라면 같은 도시적 감성과는 끝내 만날 수 없었던 거야.
<봄날은 간다>의 미장센
기자 생활 30년 하며 이 영화를 스무 번도 더 봤어. 볼 때마다 색감이 달라 보인다.
화면 속에 인물을 꽉 채우지 않아.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 이별 후의 텅 빈 공간을 카메라가 아주 오래 비춰주지. 이건 동양화의 여백과 같아. 독자가 그 빈 공간을 자신의 추억으로 채우게 만들거든.
겨울의 시린 파란색이 은수의 차가움을 대변한다면, 마지막 보리밭의 초록색은 상우의 성장을 의미해. 자연의 색은 변해도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변하면 떠난다는 걸 대조적으로 보여주지.
당신의 봄날은 안녕한가요?
"봄날은 간다"는 제목은 사실 잔인한 문장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가야만 다시 온다"는 뜻이기도 해. 손에 쥔 것을 놓아야 다른 것을 집을 수 있는 이치이다. 상우는 은수를 잃었지만, 대신 세상을 온전히 자신의 귀로 듣는 법을 배웠어.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이 된 거지.
지금 사랑 때문에 울고 있니? 너무 오래된 연인 때문에 마음이 식어가는 걸 느끼나? 괜찮아. 계절이 바뀌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고, 상우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집중해 보길 바란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기꺼이 누리고, 끝났을 때 정중히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통해 배워야 할 삶의 기술이다."
한 우물만 파왔던 나의 인생에도 다시 눈부신 봄날이 올 거라는 걸 ... 바람 소리에 실려 오는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