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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되는 미중 경쟁, 한국 외교의 '전략적 자율성'을 묻는다
- [오늘일보=김준연 발행인]2025년 여름, 미중의 전략적 경쟁은 더 이상 변수가 아닌,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상수'가 되었다. 반도체와 AI를 둘러싼 기술 전쟁은 한층 더 노골화되었고, 대만 해협의 군사적 긴장감은 동북아 안보 전체를 흔드는 뇌관이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파고 속에서, 한반도라는 배의 항해사인 대한민국 외교는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낯설지만 더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에 직면했다. 현 정부는 출범 이후 한미 동맹의 복원과 한미일 3각 협력 강화를 외교의 핵심 기조로 삼아왔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인다는 명분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그 결과, 한미 연합훈련은 정상화되었고 대미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가치에 기반한 선명한 노선은 필연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국가, 특히 우리의 최대 교역 파트너인 중국과의 관계에 경직성을 가져왔다. 사드(THAAD) 사태 이후 조심스럽게 관리되던 한중 관계는 다시금 얼어붙었고, 첨단 기술에서부터 핵심 원자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깊숙이 얽혀있는 우리 경제의 공급망 리스크는 오히려 커졌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과거의 공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새로운 생존 공식은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형국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전략적 자율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거나 양쪽을 오가는 '줄타기 외교'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굳건한 한미 동맹을 외교의 기본 축으로 삼되, 사안별로 우리의 국익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전략적 자율성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에 동참하더라도, 국내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예외 조치를 관철하기 위해 더 집요하게 미국을 설득하고 협상하는 것이 자율성이다. 중국이 특정 현안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문제 삼을 때, '동맹의 결정'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익'에 기반한 결정임을 명확한 논리로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자율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합의를 가져야 한다. 단기적 경제 이익인가, 장기적인 안보 가치인가, 혹은 기술 주권의 확보인가. 이 기준이 명확히 서야만, 외교는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가질 수 있다. 격랑의 시대에 남의 지도를 들고 항해할 수는 없다. '가치 외교'라는 이상을 추구하더라도, 그 발은 '국익'이라는 현실의 땅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 외교가 우리만의 지도와 나침반을 재정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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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되는 미중 경쟁, 한국 외교의 '전략적 자율성'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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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 '더 내고 늦게 받는' 고통 분담을 넘어선 세대 간의 약속
- [오늘일보=김준연 발행인]2025년 8월, 22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연금개혁안이 다시금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라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되며 손에 잡힐 듯했던 개혁은, 또다시 정치적 셈법과 세대 간의 불신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더 내고 늦게 받는' 고통 분담. 연금개혁을 이야기할 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이 말은 이제 모든 국민이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이 되었다. 저출생·고령화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기금 고갈은 정해진 미래이며, 이대로라면 1990년생이 연금을 받을 나이가 될 즈음엔 적립된 기금이 바닥을 드러낸다. 미래 세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연금개혁을 단순히 가입자가 감내해야 할 '손해'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숫자를 조정하는 기술적 과제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세대 간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사회적 계약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국민연금을 '내봤자 돌려받지 못할 돈'이라며 깊은 불신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불안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개혁안도 성공할 수 없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국가의 지급 보장 명문화'이다. 국가가 어떤 상황에서도 연금 지급을 책임진다는 명확한 법적 약속이야말로, 청년들이 기꺼이 개혁의 고통을 분담하게 할 가장 확실한 담보다. 이는 단순한 선언을 넘어, 연금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뿌리부터 재건하는 첫걸음이다. 동시에, 우리는 걷어들인 돈을 어떻게 불릴 것인지에 대해서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1,000조 원이 넘는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 수익률을 1%만 높여도 기금 고갈 시점을 수년 늦출 수 있다. 글로벌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기금 운용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은 보험료율을 1% 올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개혁의 한 축이다. 21대 국회는 연금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공은 22대 국회로 넘어왔다. 여야는 눈앞의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특정 세대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조금씩 양보하고 책임지며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연금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다. 이번만큼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주저하다 또다시 다음 세대에 폭탄을 떠넘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숫자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넘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재건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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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 '더 내고 늦게 받는' 고통 분담을 넘어선 세대 간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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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정답을 가르칠 것인가 질문을 가르칠 것인가
- [오늘일보=김준연 발행인] 2025년 8월, 대한민국 교육계는 거대한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정부는 AI 디지털 교과서를 통해 학생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준비 부족과 방향성에 대한 우려가 교차한다. 이 거대한 변화는 단순히 기술 도입을 넘어,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본질적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정답 암기' 능력의 종언을 고했다. 지식의 암기와 인출은 이제 기계의 영역이다. 우리 교육이 집중해야 할 것은 AI가 내놓은 그럴듯한 답변이 정말 옳은지 가려내는 비판적 사고, 여러 지식을 융합해 세상에 없던 해결책을 내놓는 창의력이다. "임진왜란은 몇 년에 일어났는가?"를 묻는 대신, "AI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당시의 해전을 재설계한다면?"과 같이 세상을 바꾸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물론 AI는 교육의 주체가 아닌, 교사와 학생을 돕는 강력한 '도구'일 뿐이다. AI가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줄 수는 있지만, 학생의 좌절에 공감하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불어넣는 것은 결국 인간 교사의 몫이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은 과거의 '지식 전달자(Sage on the stage)'에서, 학생이 AI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이끄는 '학습 촉진자(Guide on the side)'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교사 재교육과 자율성 보장은 정책의 최우선 과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다. 기술 도입의 속도전에 매몰되어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공감 능력, 공동체 의식 같은 인간 고유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AI를 따라 정답을 외우는 아이들을 길러낼 것인가, 아니면 AI에게 당당히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기술의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교육의 본질을 굳건히 지키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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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정답을 가르칠 것인가 질문을 가르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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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동상이몽..한중의 엇갈린 30년
- 2025년 8월, 북한이 동해상으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서울과 워싱턴은 즉각 이를 ‘유엔 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규정하고 강력 규탄하며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며칠 뒤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 미국과 일본은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내밀었지만, 중국은 어김없이 ‘모든 당사자의 자제와 대화를 통한 해결’을 촉구하며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30년간 북한의 핵 개발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 데자뷔(déjà vu) 같은 풍경이야말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근본적인 시각차, 즉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실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비핵화’라는 공식적인 목표는 공유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론과 우선순위에서 양국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를 넘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굳어진 2025년 현재, 한중 양국의 대북 정책이 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심층 분석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이견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한 냉정한 현실 진단이다. 제1부: 목표의 불일치 - '비핵화'가 먼저인가, '안정'이 먼저인가? 모든 이견의 출발점은 양국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의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1. 한국(과 미국)의 최우선 목표: ‘선(先) 비핵화’ 서울과 워싱턴에게 북한 문제는 곧 ‘핵 문제’다. 북한의 핵무기는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협이며, 동북아와 국제 비확산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따라서 양국의 모든 대북 정책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수렴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이 일부 초래되더라도, 핵 위협 제거라는 대의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이지만 핵을 가진 북한’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2.중국의 최우선 목표: ‘선(先) 안정’ 베이징의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중국에게 북한 문제는 ‘핵 문제’ 이전에 **‘지정학적 안보 문제’**다. 중국의 대북 정책 제1원칙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한 정권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막고,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통해 ‘안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비핵화는 물론 달성하면 좋은 ‘부차적 목표’이지만, ‘안정’이라는 대전제를 위협하면서까지 추구할 목표는 결코 아니다. ‘불편하지만 안정적인 핵보유국 북한’은, ‘급변 사태로 붕괴된 북한과 그로 인해 미군과 국경을 맞대는 최악의 상황’보다 훨씬 선호되는 시나리오다. 이처럼 ‘비핵화’와 ‘안정’이라는 결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의 우선순위 차이가, 모든 대북 정책에서 양국이 사사건건 충돌하는 근본 원인이다. 제2부: 순망치한(唇亡齿寒) - 중국의 대북정책을 지배하는 1000년의 관성 중국이 왜 이토록 북한의 ‘안정’에 집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고사를 알아야 한다. 중국에게 북한은 자국의 핵심 이익을 보호하는 ‘입술’과 같은 ‘전략적 완충지대(Strategic Buffer Zone)’다. 1)역사적 트라우마와 지정학적 숙명 :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통해 외세의 침략을 받아온 경험이 있다. 특히 70여 년 전 한국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희생시키며 북한 정권을 지켜낸 것은, 한반도에 친미(親美) 통일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한미군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맞대는 상황은 중국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안보 시나리오다. 2)급변 사태의 공포 :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경우, 중국은 두 가지 악몽과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수백만 명에 달하는 북한 난민이 국경을 넘어 동북 3성으로 밀려 들어오는 대혼란이다. 둘째는 북한 내 핵무기와 핵물질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외부로 유출될 수 있는 위험이다. 중국은 이러한 혼란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김정은 정권이 현상 유지를 하는 편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순망치한’의 전략적 관성은 중국 대북 정책의 유전자(DNA)와도 같아서, 북한이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아도 중국이 결코 북한을 포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제3부: 제재와 뒷문 - 반복되는 ‘중국 역할론’의 허와 실 북한이 핵실험이나 ICBM 발사와 같은 대형 도발을 감행할 때마다, 국제사회는 중국을 향해 ‘역할을 하라’고 촉구한다. 북한의 생명줄(원유, 식량)을 쥐고 있는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중국 역할론’이다. 그러나 지난 30년의 역사는 이 기대가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지를 보여준다. 중국의 대북 제재 패턴은 늘 일정했다. 1)동참 : 국제사회의 압박에 못 이겨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다.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 2)이완 : 그러나 제재가 북한 정권의 안정 자체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면,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원유와 식량을 공급하는 등 ‘뒷문’을 열어준다. (숨통을 틔워줌) 3)명분 : ‘제재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대화 복귀’이며, ‘북한의 인도주의적 위기는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이는 중국이 북한을 통제할 ‘의지’도 부족하지만, 때로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중국의 압박이 거세지면 러시아에 밀착하는 등,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율성을 확보해 온 오랜 경험이 있다. ‘중국 역할론’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4부: 2025년의 신(新) 변수들 - 미중 경쟁과 북·러 밀착 설상가상으로, 2020년대 들어 격화된 국제 정세는 한중의 ‘동상이몽’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1)신냉전 구도 속 북한의 전략적 가치 상승 :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되면서,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의 협력 공간은 사실상 사라졌다. 오히려 중국에게 북한은 미국의 신경을 긁고 한미일 동맹을 이완시키는 데 유용한 ‘전략적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커졌다. 중국은 이제 북한 비핵화 문제 해결을 돕는 ‘책임 있는 강대국’이 아니라, 미중 경쟁이라는 더 큰 체스판에서 북한을 ‘말(駒)’로 활용하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2)북·러 밀착이라는 새로운 변수 :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본격화된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중국 외에 러시아라는 또 다른 ‘뒷배’를 확보함으로써 대중(對中) 의존도를 낮추고 외교적 자율성을 높였다. 이는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던 중국의 대북 레버리지를 상당 부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의 역설 :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의 강화는, 중국에게는 자신을 겨냥한 ‘아시아판 나토(NATO)’의 등장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안보 딜레마는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이라는 ‘완충지대’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 제5부. 결론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한중의 ‘동상이몽’은 단순한 오해나 외교적 기싸움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생존(한국)’과 ‘패권(중국)’이라는 양국의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국가 핵심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물이다.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 2025년 현재, 중국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의 비핵화 목표에 동참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중국을 설득하여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지난 30년간의 접근법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중국의 협조’라는 변수가 아닌, ‘중국의 계산’이라는 상수 위에서 새로운 대북 전략을 짜야 하는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같은 침대에서 다른 꿈을 꾸는 이웃과 함께, 어떻게 우리의 생존과 평화를 지켜나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무거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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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동상이몽..한중의 엇갈린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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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중국'의 인구 절벽의 현실화
- 2022년 1월 17일,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수치는 세계사에 기록될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중국의 인구가 61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마오쩌둥 시대의 대기근 이후 처음으로 14억 인구 대국의 신화가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1978년 개혁개방으로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사건만큼이나, 2022년의 인구 감소는 '중국의 시대'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조용한 총성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미부선로(未富先老)'**라는 네 글자로 요약한다. 선진국처럼 ‘부유해지기도 전에 먼저 늙어버리는’ 국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도전이다. 풍부하고 젊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이 되었던 ‘인구 보너스(Demographic Dividend)’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2025년 8월 현재, 인구 감소는 일시적 현상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중국이 왜 이처럼 가파른 인구 절벽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원죄와 현재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추적하고, '늙어가는 용'이 마주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심층 진단한다. 제1부: 예고된 재앙 - '한 자녀 정책'이라는 이름의 원죄(原罪) 중국의 인구 문제를 논할 때, 1979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36년간 이어진 **‘한 자녀 정책(计划生育)’**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인구 폭발이 국가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시작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급진적인 인구 통제 실험이었다. 1. 정책의 명분과 잔혹한 현실 당시 덩샤오핑 지도부는 개혁개방의 성공을 위해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한 부부, 한 자녀’를 강제하는 이 정책은 강력한 국가 권력을 통해 집행되었다. 목표를 초과한 임신에 대해서는 강제 낙태와 불임 시술이 자행되었고, 이를 어길 시에는 막대한 벌금과 사회적 불이익이 가해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비극과 인권 유린이 발생했지만, ‘국가의 발전’이라는 대의 아래 묵인되었다. 2. 돌이킬 수 없는 유산: 비뚤어진 인구 구조 ‘한 자녀 정책’은 단기적으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중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기형적인 인구 구조를 남겼다. 1)'4-2-1' 가족 구조의 비극 : 한 명의 자녀가 부모 두 명과 조부모 네 명, 총 여섯 명을 부양해야 하는 압도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기형적인 부양비 구조다. 2)사라진 딸들, '성비 불균형' : 남아 선호 사상과 맞물려 여아에 대한 선택적 낙태가 만연했다. 그 결과, 현재 중국에는 결혼 적령기 남성이 여성보다 수천만 명 더 많은 심각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이는 결혼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다. 3)'소황제(小皇帝)' 세대의 등장 : 과보호 속에서 자란 외동아들, 외동딸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고, 이는 현재 중국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 자녀 정책’은 미래 세대의 인구를 ‘빌려와’ 현재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것과 같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청구서가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제2부: Z세대의 '출산 파업' -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2016년, 중국 정부는 뒤늦게 ‘한 자녀 정책’을 폐기하고 ‘전면적 두 자녀 정책’으로 전환했으며, 2021년에는 ‘세 자녀 정책’까지 허용했다. 그러나 출산율은 반등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파르게 추락했다. 이제 문제는 ‘낳지 못하게 하는’ 국가의 통제가 아니라, ‘낳을 수 없고, 낳고 싶지 않은’ 청년 세대의 자발적인 ‘출산 파업’으로 바뀌었다. 1. 감당할 수 없는 3대 압력: 집, 교육, 의료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3개의 거대한 산(三座大山)’**에 짓눌려 있다. 1)주택 : 천정부지로 치솟은 대도시의 집값은 평범한 월급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수준이다.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 집 문제는 결혼의 첫 번째 관문이자 가장 높은 장벽이 되었다. 2)교육 :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경쟁은 한국 이상으로 살인적이다. 조기 교육부터 시작해 각종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산층 가정의 허리를 휘게 만든다. 2021년 정부가 사교육 시장을 초토화시킨 ‘솽젠(双减)’ 정책은 역설적으로 교육 불안감만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3)의료 : 사회 안전망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녀나 부모가 아플 경우 막대한 의료비 부담을 가계가 고스란히 져야 한다는 공포가 크다. 2. ‘996’와 ‘내권(内卷)’, 그리고 ‘탕핑(躺平)’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의미의 ‘996’ 문화는 중국 청년들의 삶을 소진시키고 있다. 의미 없는 소모적 경쟁을 뜻하는 ‘내권(内卷)’ 속에서 이들은 번아웃에 내몰린다. 이러한 절망감 속에서 청년들은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최소한의 생존만 추구하는 ‘탕핑(드러눕기)’을 택하거나, 더 나아가 **“우리가 마지막 세대(我们是最后一代)”**라며 출산을 통한 고통의 대물림을 거부하고 있다. 3. 깨어난 여성들의 선택 과거 세대와 달리,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경제적 자립을 이룬 현대 중국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가부장적인 결혼 문화와 독박 육아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경력과 삶을 희생하기를 거부하며, 비혼과 비출산을 삶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제3부: '인구 보너스'의 소멸 - 경제에 드리운 그림자 인구 구조의 역전은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의 시장’이었던 중국 경제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1)노동력 부족과 제조업의 위기 :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은 ‘메이드 인 차이나’의 핵심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노동 인구(15~59세)는 2012년을 정점으로 이미 10년 넘게 감소 중이다. 공장에서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인건비는 급등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2)소비 시장의 붕괴 : 젊은 인구는 소비의 주체다.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아기용품부터 자동차,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수 시장이 구조적으로 위축됨을 의미한다. 이는 ‘내수 중심 성장’을 외치는 중국 정부의 계획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3)연금 시한폭탄 : 현재 중국의 연금 제도는 ‘두 명의 노동자가 한 명의 퇴직자를 부양’하는 구조지만, 수년 내에 ‘한 명의 노동자가 한 명의 퇴직자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연금 고갈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이며, 이는 거대한 사회 불안의 뇌관이 될 수 있다. 제4부.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인구 위기는 부동산 부채나 미중 갈등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도전이다. 다른 문제들은 정책적 노력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할 여지가 있지만, 인구라는 거대한 흐름은 한번 방향이 바뀌면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출산 장려를 위해 현금 보조금, 육아 휴직 확대 등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청년들이 겪는 구조적인 압력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책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시진핑 주석이 최근 ‘새로운 시대의 결혼·출산 문화’를 강조하며 국가주의적 해법을 모색하는 듯한 움직임도 보이지만, 이는 오히려 젊은 세대의 더 큰 반발을 살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인구 보너스'에 기반한 중국의 기적적인 성장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중국은 줄어드는 노동력과 늘어나는 부양 부담 속에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중국의 꿈’은 '늙어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 빛이 바래고 있다. 인구는 운명이다. 그리고 중국은 지금, 그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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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중국'의 인구 절벽의 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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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지갑, 멈춰선 성장: 14억 소비 대국의 침묵
- 한때 세계의 모든 명품 매장은 중국인 관광객(유커)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손에는 명품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씀씀이는 글로벌 기업들의 실적을 좌우했다. '14억 인구의 중산층이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세계 경제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얻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했다. 중국 정부 역시 ‘수출·투자’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내수·소비’ 중심으로 전환하는 ‘쌍순환(雙循環)’ 전략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나 2025년 8월 현재, 그 거대한 소비 엔진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상하이의 화려한 쇼핑몰은 한산하고, 젊은이들은 값비싼 신상 대신 중고 거래 앱을 탐색한다. 은행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도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집이나 차를 사는 대신, 기록적인 속도로 저축 예금을 늘리고 있다. 이른바 **‘소비 절벽(Consumption Cliff)’**의 도래다. 이는 단순한 경기 둔화를 넘어, 중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감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중국 소비자들이 왜 지갑을 닫게 되었는지, 그들의 소비 패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침묵이 중국과 세계 경제에 보내는 경고음은 무엇인지 심층 취재했다. 제1부: 신화의 종언 - 무엇이 소비의 불을 껐나? 중국인들의 소비 심리가 급격하게 얼어붙은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충격’을 핵심 요인으로 꼽는다. 1. 부동산 불패 신화의 붕괴: 자산 쇼크 지난 20년간 중국 중산층의 부(富)는 사실상 ‘부동산’과 동의어였다. ‘오늘 산 아파트 가격이 내일이면 오른다’는 믿음은 사람들을 과감하게 소비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산 효과(Wealth Effect)’를 낳았다. 내 자산이 불어나고 있다는 착각은 미래에 대한 낙관론으로 이어졌고, 이는 자동차, 가전, 사치품 소비를 견인했다. 그러나 2021년 헝다 사태로 시작된 부동산 시장의 장기 침체는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산 가치 하락’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패닉에 빠졌다. 자산이 줄어들고 있다는 공포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즉, 부동산 쇼크가 소비 심리의 근간을 무너뜨린 첫 번째 도미노였다. 2. 고용 한파와 소득 불안: 미래 쇼크 지갑을 여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미래 소득에 대한 안정적인 기대’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중국,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는 사치가 되었다. 1)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 : 빅테크와 부동산, 사교육 등 과거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던 산업들이 정부의 규제 철퇴를 맞고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청년 실업률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2)기존 직장인의 임금 삭감 : 경기 둔화는 기업과 지방 정부의 재정 악화로 이어져, 민간 기업은 물론 공무원 사회에서조차 임금 삭감과 보너스 취소 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의 직장이 내일도 보장된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생애주기적 소비를 포기하거나 무기한 연기하는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내수 시장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3. '제로 코로나'가 남긴 심리적 상처: 신뢰 쇼크 3년간 이어진 고강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도시 전체가 예고 없이 봉쇄되고, 하루아침에 직장과 수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를 집단적으로 체험했다. 이 경험은 중국인들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언제든 통제할 수 있다는 불신. 둘째,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방적 저축(Precautionary Savings)’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이다. 제로 코로나 해제 이후 ‘보복 소비’가 터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가계 저축률이 폭증한 것은 이러한 심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방증한다. 제2부: '소비 강급(消费降级)' 시대의 풍경 지갑을 닫은 중국인들은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을 넘어, 소비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른바 **‘소비 강급’**이라 불리는 새로운 트렌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1)"가성비를 숭배하라" : 과거 브랜드와 과시를 중시하던 소비 문화는 이제 ‘가성비(性价比)’를 최우선으로 따지는 문화로 바뀌었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대신 저가 공동구매 플랫폼인 ‘핀둬둬(拼多多)’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화려한 플래그십 스토어 대신 창고형 할인 매장이 인기를 끈다. 스타벅스 대신 1/3 가격의 ‘루이싱 커피(瑞幸咖啡)’를 마시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로 여겨진다. 2)"체험은 하되, 사치는 금물" : 소비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향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고가’에서 ‘저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특종병사식 여행(特种兵式旅游)’**이다. 이는 주말 등을 이용해 최소한의 경비로 잠을 줄여가며 최대한 많은 관광지를 둘러보는 초저가 여행 방식을 뜻한다. 비싼 해외여행 대신 저렴한 국내 소도시 여행이 각광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중고 거래와 알뜰 소비의 일상화" : 명품을 새로 사는 대신 중고 명품을 찾고, 최신 스마트폰 대신 중고폰을 구매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돈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가 모든 소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제3부: 정부의 고민 - 왜 부양책은 효과가 없는가?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자 중국 정부도 칼을 빼 들었다.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일부 도시에서는 소비 쿠폰을 발행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왜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신뢰’의 부재에 있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풀고 대출을 장려해도, 가계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 돈은 소비로 흐르지 않고 은행 계좌에 쌓일 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과 유사한 상황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서구 국가들처럼 국민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대규모 재정 부양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지주의는 나태를 낳는다’는 공산당의 전통적인 통치 철학과, 부채가 심각한 지방 정부에 더 큰 재정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 부진의 원인은 ‘수요’ 측면의 심리 위축에 있는데, 정부의 정책은 여전히 ‘공급’ 측면의 인프라 투자에 머무는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4부: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소비 절벽은 ‘성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는 중국 경제가 투자와 수출이라는 두 바퀴만으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닫힌 소비자의 지갑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금리를 낮추고 보조금을 주는 단기 처방을 넘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만들며, 예측 가능한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중국 소비자의 침묵은 단순히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시장’ 중국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면, 독일의 자동차 공장도, 프랑스의 와이너리도, 한국의 반도체 기업도 함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 지도부가 이 거대한 ‘수요의 실종’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21세기 세계 경제의 향방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14억 인구의 기나긴 침묵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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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지갑, 멈춰선 성장: 14억 소비 대국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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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의 돌진. 중국 지방정부 '부채 폭탄'
- 중국의 도시들을 방문하면 세계를 압도하는 인프라에 감탄하게 된다.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대륙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고속철도, 최첨단 설비의 공항과 항만. 지난 30년간 중국이 이룩한 눈부신 성장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경관은 거대한 신기루일지 모른다. 그 기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부채’라는 이름의 모래성이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현재, 중국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을 꼽으라면 단연 ‘지방 정부 부채’ 문제다. 비공식 통계까지 합하면 그 규모가 90조 위안(약 1경 7000조 원)을 넘어 중국 GDP의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이미 예견된 위험이었으나 모두가 애써 외면해 온 **‘회색 코뿔소(Gray Rhino)’**다. 이제 부동산 시장의 붕괴라는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킨 코뿔소가 중국 경제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지방 정부의 재정에 직격탄이 되었다. 과거 지방 정부는 토지사용권 매각 수입에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왔다. 이 수입원이 막히자, 사회기반시설 투자 등을 위해 무리하게 빌려 쓴 막대한 규모의 '숨겨진 부채(LGFV)'가 시한폭탄으로 떠올랐다.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중앙정부에 손을 벌리고 있지만, 이는 결국 국가 전체의 재정 건전성을 뒤흔들 수 있는 '회색 코뿔소(예견 가능하지만 간과되는 위험)'로 지목되고 있다. 제1부: 괴물의 탄생 - LGFV와 '토지 재정(土地财政)'의 기원 중국의 지방 부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LGFV(Local Government Financing Vehicle, 地方政府融资平台)’**라는 독특한 존재를 알아야 한다. LGFV는 지방 정부가 사회기반시설 투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 즉 ‘숨겨진 주머니’다. 1. 중앙과 지방의 비대칭적 재정 구조 모든 문제의 뿌리는 1994년의 분세제(分税制)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부는 재정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세 수입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 반면, 도로 건설, 학교 설립, 공공 서비스 등 돈 쓸 일은 대부분 지방 정부의 몫으로 남겨뒀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어나는 재정 구조의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이 예산법상 지방 정부가 직접 은행 대출을 받거나 채권을 발행하는 길은 엄격히 막혀 있었다. 2. '숨겨진 주머니' LGFV의 등장 궁지에 몰린 지방 정부는 법망을 우회할 기발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지방 정부 소유의 국유기업 형태인 LGFV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LGFV는 명목상 독립된 기업이기에 은행 대출과 채권 발행이 자유로웠다. 지방 정부는 보유한 토지의 사용권을 LGFV에 담보로 제공했고, LGFV는 이를 바탕으로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빌려 인프라 건설에 쏟아부었다. 3. '토지 재정'이라는 마약 이 기형적인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마법의 연료는 바로 **‘토지 재정(土地财政)’**이었다. 중국의 토지는 국가 소유이므로, 지방 정부는 토지사용권(보통 40~70년)을 부동산 개발업체에 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부동산 시장이 활황일 때 이 모델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1)지방 정부 : 토지 판매로 재정을 확충하고, 인프라 건설로 GDP 성장률(핵심 고과 지표)을 높여 관리들은 승승장구했다. 2)은행 : 정부가 뒤를 봐주는 LGFV에 안심하고 돈을 빌려주며 막대한 이자 수익을 올렸다. 3)개발업체 : LGFV가 닦아놓은 신도시의 땅을 사서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이 ‘부채와 토지에 기반한 성장 모델’은 지난 20년간 중국의 압축 성장을 이끈 핵심 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폭탄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2부: 멈춰버린 성장 엔진 - 무엇이 위기를 촉발했나 영원할 것 같던 ‘부채의 축제’는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종말을 맞이했다. 1. 방아쇠가 된 부동산 시장의 붕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부동산 시장의 경착륙이다. 과열된 부동산 시장의 부채 리스크를 우려한 중앙정부가 2020년 강력한 대출 규제인 '세 개의 레드라인(三道红线)'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헝다, 비구이위안과 같은 거대 개발업체들의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촉발하며 부동산 시장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개발업체들이 도산하고 아파트가 팔리지 않자, 더 이상 지방 정부로부터 토지를 사들일 주체가 사라졌다. ‘토지 재정’이라는 핵심 돈줄이 막히면서, 지방 정부와 LGFV는 빌린 돈의 이자조차 갚기 어려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2. 재정을 고갈시킨 '제로 코로나' 정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간 이어진 고강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지방 정부의 재정을 완전히 고갈시켰다. 전 주민 PCR 검사, 대규모 격리 시설 건설, 봉쇄에 따른 경제 활동 중단 등 막대한 방역 비용을 모두 지방 정부가 떠안았다. 이는 가뜩이나 위태롭던 지방 재정에 결정타를 날렸다. 3. 수익성 없는 투자와 부채의 악순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채로 건설한 수많은 인프라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GDP 실적을 위해 경쟁적으로 지어진 유령 도시, 이용객이 거의 없는 공항과 고속철도는 유지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빚을 내서 지은 자산이 새로운 현금을 창출하지 못하니,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더 큰 빚을 내야 하는 전형적인 ‘부채의 덫’에 빠진 것이다. 제3부: 위기의 현주소 - 버스 중단에서 월급 체불까지 부채 폭탄의 여파는 이제 중국 인민들의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1)공공 서비스의 마비 : 허난성의 일부 도시에서는 재정난으로 시내버스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 부채가 심각한 지역에서는 공무원과 교사의 월급, 퇴직 연금이 몇 달씩 체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금융 시스템으로의 전이 : LGFV가 발행한 채권(성투채, 城投债)은 주로 지방의 중소 은행들이 대거 보유하고 있다. 만약 LGFV의 디폴트가 연쇄적으로 발생할 경우, 부실 채권을 떠안은 지방 은행들의 건전성이 악화되며 국지적 금융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3)'반쪽짜리' 도시들 :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된 도로, 짓다 만 아파트와 상업 시설들이 중국 전역에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다. 이는 도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국민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제4부: 중앙정부의 딜레마 - '구제금융'이냐 '구조조정'이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시선은 베이징의 중앙정부로 쏠리고 있다. 시진핑 지도부는 이 회색 코뿔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1. 옵션 1 : 전면적 구제금융(Bailout):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지방의 부채를 갚아주는 방식이다. 1)장점: 대규모 디폴트를 막아 금융 시스템 붕괴와 사회 불안을 막을 수 있다. 2)단점: 지방 정부에 ‘빚을 아무리 져도 결국 중앙이 해결해준다’는 잘못된 신호(도덕적 해이)를 줄 수 있다. 또한 중앙정부의 재정 부담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2. 옵션 2: 고통 분담과 구조조정(Restructuring): 일부 LGFV의 파산을 용인하고, 지방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방식이다. 1)장점: 시장 원리에 따라 부실을 정리하고, 지방 정부의 무분별한 부채 증가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2)단점: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 파산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며, 공공 서비스 축소로 인한 민심 이반과 사회 불안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시간 벌기’와 ‘책임 떠넘기기’**라는 절충안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앙정부가 직접 구제에 나서기보다는, 부채가 비교적 덜 심각한 성(省) 정부가 재정난에 빠진 시(市) 정부를 지원하게 하는 ‘성급 책임제’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LGFV 채권의 만기를 연장해주거나 저금리 대출로 갈아타게 해주는 방식으로 급한 불만 끄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를 미래로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3. 결론 및 제언 중국의 지방 정부 부채 문제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중앙집권적 정치 시스템과 지방분권적 경제 개발 사이의 구조적 모순이 빚어낸 필연적 산물이다. 이는 ‘부채 주도 성장’이라는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경고등이다. 돌진하는 회색 코뿔소 앞에서 시진핑 지도부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과감한 수술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겠지만, 수술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시간을 끌다가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넘어선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거대한 부채의 청구서는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가 터져 나올 때, 그 충격파는 결코 중국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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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의 돌진. 중국 지방정부 '부채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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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嫌韓)과 반중(反中) 루비콘 강을 건넜나
- 외교 관계에서 ‘국민 감정’은 종종 수면 아래에 머문다. 정상 간의 악수, 수십억 달러의 무역액, 화려한 문화 교류라는 거대한 빙산의 아래에 가려져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2025년 현재, 한중 관계라는 거대한 배는 바로 이 ‘국민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최근 몇 년간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는 충격적인 현실을 일관되게 가리킨다.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는 80%를 상회하며, 이는 전통적인 라이벌인 일본을 넘어선 지 오래다. 중국 역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한때 ‘한류’에 열광하고 ‘꽌시(關係)’를 외치며 서로를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 여겼던 양국 국민은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를 향해 ‘짱깨(蔑称)’와 ‘빵즈(棒子)’라는 멸칭을 서슴없이 던지는 사이가 되었다. 정치·경제적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봉합될 수 있지만, 한번 깊어진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양국 관계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깊은 불신과 적대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왜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가. 한중 관계의 가장 연약하고 아픈 속살인 ‘국민 감정’의 실체를 해부하고, 양국이 건너고 있는 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의 의미를 진단한다. 제1부: 한국의 ‘반중(反中)’ -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 사회의 반중 정서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과거 고구려사 왜곡(동북공정) 등 역사 문제에서 비롯된 불씨가 잠재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전 세대에 걸친 거대한 분노로 폭발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 사드 사태: ‘경제 파트너’의 배신과 ‘굴욕’의 기억 모든 전문가들은 2017년 사드 사태를 한국 내 반중 감정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꼽는다. 이전까지 중국은 ‘기회의 땅’이자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사드 배치를 빌미로 가해진 전방위적 경제 보복(한한령)은 이러한 인식을 산산조각 냈다. 1)힘의 논리에 대한 각성 : 중국은 한국의 안보 주권을 존중하기는커녕,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경제를 ‘무기화’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중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깊은 불신을 심었다. 2)국가적 자존심의 상처 : 롯데에 대한 표적 보복, 한국행 단체관광 금지 등 노골적인 방식의 압박은 단순한 경제적 피해를 넘어 국민적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대국’이라던 중국의 ‘소인배’ 같은 행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사드 사태는 많은 한국인에게 ‘중국몽(中國夢)’의 실체가 패권주의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트라우마로 남았다. 2. 일상을 파고든 위협: 미세먼지와 코로나19 사드 사태가 ‘국가 대 국가’의 문제였다면, 미세먼지와 코로나19는 국민 개개인의 삶과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며 반중 감정을 일상화, 체감화시켰다. 1)뿌연 하늘, 답답한 마음 (미세먼지) : 매년 봄철이면 한반도를 뒤덮는 최악의 미세먼지.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책임을 부인하거나 ‘서울의 미세먼지는 서울에서 배출된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숨 쉴 권리마저 침해당하고 있다는 무력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2)팬데믹의 공포와 책임론 (코로나19) : 2020년 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바이러스의 기원, 초기 대응 과정에서의 정보 통제 및 은폐 의혹은 중국에 대한 국제적 불신을 키웠고,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염병이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중국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되었다. 3. 정체성을 향한 공격: 문화·역사 공정 최근 몇 년간 격화된 김치, 한복, 갓 등 한국 고유문화에 대한 ‘원조’ 주장은 불타는 반중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중국의 아류로 폄하하려는 ‘문화 동북공정’이라는 인식을 낳았다. 특히 K-팝, K-드라마 등 한류의 세계적 성공에 자부심을 느끼는 젊은 MZ세대에게 이러한 ‘문화 약탈’ 시도는 용납할 수 없는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중국의 주장을 반박하고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사이버 외교관’을 자처했다. 이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반중 정서는 **안보(사드) → 일상(미세먼지/코로나19) → 정체성(문화 공정)**의 순서로 전방위적으로 심화, 확산되어 왔다. 이는 더 이상 일부 보수층의 이념적 반공주의가 아닌, 세대와 이념을 초월한 보편적인 국민 정서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제2부: 중국의 ‘혐한(嫌韓)’ - 그들은 왜 한국을 적대하는가 반면, 중국 내에서 확산되는 혐한 감정의 기저에는 한국의 반중 정서와는 또 다른 복합적인 심리가 깔려있다. 1. 사드, ‘믿었던 동생’의 배신감 중국인들에게 사드 배치는 ‘안보 위협’ 이전에 ‘배신감’으로 먼저 다가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는 등 친중 행보를 보였기에, 그 직후 이어진 사드 배치 결정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바로 옆집의 ‘동생’이라 여겼던 한국이 자신의 심장에 칼(레이더)을 꽂는 미국의 편에 섰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러한 여론에 불을 지폈고, 일반 대중에게 한국은 ‘미국의 앞잡이’, ‘주권 없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2. 문화적 우월감과 ‘한류’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국을 중화 문화권의 일부이자 문화적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로 여겨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K-팝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휩쓰는 현상은 이러한 전통적인 위계질서에 균열을 냈다. 1)시기와 질투 : 한때 자신들의 ‘학생’이었던 한국이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현실에 대한 일부 중국인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혐한 감정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는 ‘한국 문화는 뿌리가 없다’, ‘전부 중국 것을 베껴간 것’이라는 식의 폄하와 ‘원조’ 주장으로 이어진다. 2)문화적 자신감의 발로 : 시진핑 시대에 강조되는 ‘문화 자신감’과 애국주의는, 한류의 성공을 자극제로 삼아 ‘중화 문화의 위대함’을 다시금 과시하려는 욕구로 나타났다. 한국 문화를 중국 문화의 하위 범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샤오펀훙(小粉红)’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민족주의 중국의 혐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강력한 애국주의와 중화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 이른바 ‘샤오펀훙(소분홍)’이다. 이들은 중국의 성장을 보고 자라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국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사이버 전사’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 한국은 ▲미국에 빌붙어 중국을 위협하고, ▲자국의 문화를 훔쳐 제 것인 양 행세하며, ▲스포츠 경기 등에서 비신사적인 행동을 일삼는 ‘괘씸한 나라’로 인식된다. 한국 연예인이 SNS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만 해도 좌표를 찍고 몰려가 악플 테러를 가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 패턴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온라인 민족주의는 양국 젊은 세대 간의 감정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고 있다. 제3부: 결론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가? 한중 양국의 국민 감정 악화는 단순한 오해나 일시적인 갈등이 아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 각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성, 그리고 온라인 플랫폼이 만들어낸 증오의 확산 구조가 맞물려 만들어진 구조적인 문제다. 과거에는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에 따라 정치적 갈등이 있더라도 경제·문화 교류는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사드 사태를 거치며 이러한 믿음은 깨졌다. 이제는 정치·안보 갈등이 곧바로 경제와 문화, 그리고 국민 감정에 직격탄을 날리는 ‘정경일치(政經一致)’의 시대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러한 감정의 골이 미래 세대로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교류의 경험이 없는 양국의 젊은 세대는 온라인이라는 왜곡된 창을 통해 서로를 배우고 혐오를 학습한다. 이들이 양국 관계의 주역이 될 10~20년 뒤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해법은 없는가?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만으로는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갈등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언어를 경계하는 미디어의 자성,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가르치는 교육, 그리고 왜곡된 정보의 확산을 막고 건전한 공론을 만들어 나갈 시민사회의 노력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떤 노력도 거대한 증오의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한중 양국은 지금,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감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 각자의 강둑에 서서 멀어지는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강을 다시 건널 교량을 놓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도 절박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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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嫌韓)과 반중(反中) 루비콘 강을 건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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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와 한한령(限韓令), 안보 딜레마
- 사드 사태는 단순한 외교 마찰을 넘어, 안보, 경제, 외교, 국민 정서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현재의 한중 관계를 규정짓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2017년의 대한민국은 둘로 나뉘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반입을 막으려는 주민들의 절규와 경찰의 방패가 뒤엉켰다. 서울 명동의 화장품 가게들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유커)의 발길이 뚝 끊겨 유령 도시처럼 변해갔다. TV에서는 한국 연예인들이 사라졌고, 중국에 진출했던 수많은 기업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 불매운동과 영업정지의 칼날 위에 섰다. ‘사드 사태’는 이 모든 풍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름이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기 위한 ‘주권적 방어 조치’라는 한국의 외침은, 자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침해당했다는 중국의 거대한 분노 앞에 힘을 잃었다. 그 분노는 ‘한한령(限韓令)’이라는 이름의 전방위적 경제 보복으로 구체화되었고, 1992년 수교 이래 낙관론이 지배했던 한중 관계는 근본부터 흔들렸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사드 배치 결정의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 격동의 시간을 복기하며 우리 사회와 한중 관계에 남겨진 깊은 흔적을 추적했다. 제1부: 결정의 서막 - 왜 ‘사드’였나? 1. 고도화되는 북한의 위협, 방패가 필요했다 2010년대 중반, 한반도의 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 수립 이후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노골적으로 감행하며 대남 위협 수위를 연일 끌어올렸다. 특히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성공 등 미사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패트리엇(PAC-2/3) 미사일 방어 체계로는 요격 고도와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킬 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등 우리 군의 자체적인 방어 능력 구축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의 ‘사드’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사드는 요격 고도가 40~150km에 달해, 하강하는 적의 탄도미사일을 높은 고도에서 직접 요격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 시스템 중 하나로 꼽혔다. 2. ‘안미경중(安美經中)’의 딜레마, 선택의 기로에 서다 사드 카드가 등장하자 한국은 외교적 딜레마에 빠졌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노선으로 양대 강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 온 한국에게 사드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시험대와 같았다. 미국은 동맹국 보호와 자국 MD(미사일 방어) 체계의 확장이라는 틀 안에서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반면, 중국은 사드 배치를 자국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으로 규정하며 일찌감치부터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박근혜 정부는 초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시간을 벌고자 했다. “미국의 요청도, 협의도, 결정도 없었다”는 이른바 ‘3NO’ 입장을 견지하며 중국을 달랬다. 2015년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며 과시했던 양국의 우호 관계가 이러한 기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2016년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북한의 폭주를 제어하는 데 중국이 소극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 내 기류는 급격히 ‘사드 배치 용인’으로 기울었다. 결국 2016년 7월 8일,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에 사드 체계를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안보’가 ‘경제’를 압도한 순간이었다. 제2부: 보복의 칼날 - ‘한한령’, 한국의 모든 것을 겨누다 중국의 보복은 공식 발표가 나자마자 즉각적이고, 전방위적이며, 집요하게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단 한 번도 ‘한한령’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동원한 방식은 공식적인 제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행정 규제, 언론을 통한 여론전, 민간의 불매 운동이 결합된 ‘보이지 않는 보복’은 한국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밀하게 타격했다. 1. 유커(遊客)의 증발: 관광·유통업의 궤멸 가장 먼저 칼날이 향한 곳은 관광 산업이었다. 2017년 3월, 중국 국가여유국은 베이징과 산둥성 등 주요 여행사에 한국행 단체관광 상품 판매를 전면 중단하라는 구두 지시를 내렸다. 연간 800만 명에 달하던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하루아침에 끊겼다. 1)명동과 제주도의 몰락 : 유커들로 북적이던 서울 명동과 제주는 직격탄을 맞았다. 화장품 가게, 식당, 면세점들은 줄줄이 폐업하거나 개점휴업 상태에 빠졌다. 2017년 방한 중국인 관광객 수는 전년 대비 48.3% 급감하며 반 토막이 났다. 2)면세점 업계의 위기 :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중국인에게 의존하던 국내 면세점들은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재고는 쌓이고 매출은 급락하며 수조 원대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2. 롯데, 표적이 되다 사드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롯데그룹’은 중국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중국 당국은 롯데의 현지 사업장에 대해 소방, 위생,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인 세무조사와 행정 조사를 벌였다. 1)마트 영업 중단 사태 : 중국 내 99개에 달하던 롯데마트 점포 중 87곳이 소방 점검 등을 이유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관영매체가 주도하는 불매 운동까지 겹치면서 롯데마트의 중국 사업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2)천문학적 손실과 사업 철수 : 롯데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18년 중국 시장에서 마트 사업의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입은 손실액만 수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롯데의 사례는 중국이 정치적 이유로 외국 기업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3. 문화의 빗장: K-콘텐츠의 실종 ‘한한령’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문화·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피해도 막심했다. 1)출연 금지 및 수입 중단 : 중국 방송에서 한국 연예인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신규 수입이 전면 금지됐다. 이미 촬영을 마친 한중 합작 드라마들은 방영이 무기한 연기되며 막대한 제작비 손실을 입었다. 2)K-팝 콘서트 취소 : 중국에서 예정되었던 K-팝 아이돌 그룹들의 콘서트와 팬 미팅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이는 한류의 가장 큰 시장이었던 중국의 문이 닫혔음을 의미했다. 3)게임 판호 발급 중단 : 중국 시장 진출의 필수 조건인 ‘판호’(서비스 허가권) 발급이 한국 게임사들에게는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국내 게임업계는 수년간 중국 시장에 신작을 출시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 외에도 현대·기아차의 판매량 급감,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미지급 등 보복의 칼날은 한국의 주력 산업 거의 모든 분야를 향했다. 제3부: 중국의 논리 - 그들은 왜 ‘전략적 이익’을 외쳤나? 중국이 이토록 극렬하게 반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북한 방어용’이라는 사드가 실제로는 자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안보적 불신이 그 핵심에 있다. 1. X-밴드 레이더, 중국의 심장을 겨누다 중국이 문제 삼은 것은 사드 미사일 자체가 아니라, 그 구성 요소인 ‘AN/TPY-2’ X-밴드 레이더였다. 이 레이더의 탐지 거리는 최대 1,800k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반도에 배치될 경우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 대부분의 군사 동향을 손금 보듯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었다. 즉, 중국은 사드 레이더가 자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를 감시하고, 이 정보를 미국 MD 체계와 공유함으로써 자국의 ‘핵 보복 능력’을 무력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는 미중 간의 ‘전략적 균형’을 깨뜨리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는 인식이었다. 한국의 ‘생존권’이 중국의 ‘전략적 이익’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2.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준다(杀鸡儆猴)’ 중국의 거친 보복에는 또 다른 전략적 의도가 숨어있었다. 바로 ‘살계儆猴’, 즉 닭(한국)을 죽여 원숭이(미국과 주변국)를 겁준다는 계산이다. 중국은 한국을 본보기로 삼아, 향후 미국의 MD 체계에 편입하려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일본, 필리핀 등)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자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는 국가는 동맹 관계나 경제적 교류와 무관하게 언제든 가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 자국의 ‘레드 라인’을 설정하고, 이를 넘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과시였다. 제4부: 봉합과 남겨진 상처 - ‘3불 1한’과 그 이후 1. 3불(不)1한(限)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은 2017년 10월 31일, 양국이 ‘한중 관계 개선 관련 협의 결과’를 발표하며 외교적으로 봉합 국면에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중국 측에 전달한 이른바 ‘3불(不) 1한(限)’ 입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불(不):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1한(限): 이미 배치된 사드 운용을 제한하여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한다. 이 합의로 단체 관광이 일부 재개되는 등 급한 불은 껐지만, 이는 한국의 안보 주권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동시에 낳았다. 2. 사드가 남긴 깊은 상처와 교훈 1)깨져버린 신뢰, 돌아선 민심 : 사태 이전까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중국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었다. 한국 국민의 반중(反中) 정서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양국 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차이나 리스크’의 학습과 공급망 재편 : 한국 기업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경제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사드 사태는 이후 코로나19, 요소수 사태 등을 거치며 ‘탈(脫)중국’ 및 공급망 다변화 논의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돌아오지 않는 한류 : 한한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K-콘텐츠는 여전히 중국 시장에서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한류는 동남아, 유럽, 북미 등지로 시장을 다변화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를 맞았다. 4. 결론 및 제언 사드 사태는 1992년 수교 이후 25년간 이어진 한중 관계의 1막이 끝나고, 갈등과 경쟁이 새로운 상수가 된 2막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일한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미중 신냉전 시대의 냉혹한 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된 사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안보 현안이다. ‘3불 1한’의 족쇄는 여전히 우리 외교의 선택지를 제약하고 있다. 사드 사태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 주권을 그 어떤 경제적 이익이나 외교적 관계로도 타협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동시에, 강대국들의 힘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더욱 정교하고 냉철한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는 과제를 남겼다. 사드의 먼지는 가라앉았지만, 그로 인해 드러난 한중 관계의 민낯과 동북아의 지정학적 균열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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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와 한한령(限韓令), 안보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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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총성, 김치·한복 논쟁
-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중 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한류(韓流)’와 ‘치맥(치킨과 맥주)’이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 대륙을 휩쓸고, 한국의 화장품과 패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문화는 양국 국민의 마음을 잇는 가장 부드럽고 강력한 다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2020년대를 기점으로 그 다리는 곳곳이 끊어지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 양국의 젊은 세대는 서로를 향해 ‘문화 도둑’, ‘역사 왜곡’이라며 날 선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 중심에 ‘김치’와 ‘한복’이 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자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문화유산이 어느 날 갑자기 ‘중국 것’이라는 주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른바 ‘김치·한복 공정(工程)’.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일부 네티즌의 설전을 넘어, 시진핑 시대 중국의 팽창하는 문화 민족주의와 한국 사회의 불안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전선(戰線)이 되었다. 이 문화 전쟁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양국의 정치·사회적 욕망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것은 음식과 옷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체성과 자존심, 그리고 미래 세대의 인식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제1부: 김치의 눈물, ‘파오차이’라는 이름의 멍에 1. 발단: ISO 인증과 환구시보의 불씨 2020년 11월, 모든 논쟁의 시작점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쓰촨성의 염장채소인 ‘파오차이(泡菜)’가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국제 표준 인증을 획득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파오차이의 인증 그 자체가 아니었다. ISO 문서 스스로도 “이 문서는 김치(Kimchi)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하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중국의 관영매체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 “중국 김치 산업이 국제 김치 시장의 기준이 됐다”, “한국은 굴욕을 당했다”는 식의 선동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는 곧바로 중국 최대 소셜미디어인 웨이보를 통해 확산됐고, ‘한국의 김치는 사실 중국 파오차이의 아류’라는 인식이 기정사실처럼 퍼져나갔다. 한국 언론이 팩트체크를 통해 반박에 나섰지만, 이미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뒤였다. 2. 중국의 논리: ‘문화 동북공정’과 중화 패권주의 중국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논리로 요약된다. 첫째, 역사적 연관성이다. 한국의 채소 절임 문화가 고대 중국에서 전래되었으며, 따라서 김치는 큰 틀에서 중국의 파오차이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족’을 고리로 한 편입 논리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 김치를 먹으니, 김치는 자연스럽게 중국 문화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편입하려 했던 ‘동북공정’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국의 경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와 문화를 ‘중화(中華)’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 넣으려는 시도, 이른바 ‘문화 동북공정’의 서막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강화된 ‘문화 자신감(文化自信)’과 애국주의 교육의 산물로 분석한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 아래, 주변국의 고유문화까지 자국의 역사로 포섭하려는 문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3. 한국의 반박: 과학과 역사가 증명하는 김치의 독자성 이에 대한 한국의 반박은 명료하다. 김치와 파오차이는 기원, 재료, 발효 방식에서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1)기원과 역사 : 한국의 김치는 삼국시대부터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던 ‘저(菹)’ 문화에서 출발, 고려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향신료가 추가되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붉은 김치의 형태로 발전했다. 반면, 파오차이는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 단기간에 발효시키는 쓰촨 지역의 염장채소다. 2)발효 방식의 차이 : 김치는 젓갈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 다양한 양념을 버무려 저온에서 유산균으로 서서히 발효시키는 ‘발효 과학’의 정수다. 이에 반해 파오차이는 소금물에 채소를 담가 젖산 발효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김치와는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군부터 다르다. 3)문화적 상징성 : 한국에서 김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공동체 문화의 상징이다. 이웃과 함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김장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독창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명백한 역사적, 과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억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사실 관계의 증명보다는 ‘문화적 종주국’이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2부: 한복의 수난, ‘한푸’라는 이름의 그림자 1. 발단: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충격 김치 논쟁의 불씨가 채 꺼지기도 전인 2022년 2월, 더 큰 충격이 전 세계를 덮쳤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전달하는 퍼포먼스에 분홍색 저고리와 푸른색 치마, 즉 누가 봐도 명백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중국 내 소수민족 대표 중 한 명으로 등장한 것이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은 한복이 자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의 의상이므로, 이는 곧 중국 문화의 일부라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켰다. 한국 사회는 들끓었다. 이는 단순히 옷 한 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민족 복식을 자국의 다문화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 정체성을 희석시키려는 명백한 ‘문화 찬탈’ 행위라는 분노가 폭발했다. 2. 중국의 논리: ‘영향’을 ‘기원’으로 둔갑시키다 한복을 둘러싼 중국의 주장은 더욱 교묘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한국이 중국 왕조(특히 명나라)의 의복 양식에 영향을 받았으므로, 한복은 중국 ‘한푸(漢服)’의 아류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복식이라는 논리를 편다. 온라인에서는 한복과 명나라 시대 한푸를 비교하며 유사성을 부각하는 콘텐츠가 대량으로 유포된다. 하지만 이는 문화의 ‘상호 교류’와 ‘종속’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전형적인 논리 왜곡이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파스타가 중국의 면 요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고 해서 파스타를 중국 음식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국의 논리는 이러한 보편적 문화 교류의 역사를 무시하고, 모든 영향 관계를 ‘중화’로의 일방적 편입 관계로 재단하려는 패권적 시각을 드러낸다. 3. 한국의 반박: 독자적 발전 계보를 지닌 민족의 옷 한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중국의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교류하며 일부 유행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짧은 상의(저고리)와 풍성한 하의(치마/바지)’라는 기본 구조를 유지하며 우리 고유의 미감과 생활양식에 맞게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넉넉하고 우아한 실루엣의 한푸와 달리, 상의는 짧아지고 하의는 풍성해지는 ‘상박하후(上薄下厚)’의 독창적인 미학을 완성했다. 저고리의 ‘고름’, 치마의 ‘허리끈’ 등 세부적인 구조와 착장 방식 역시 한푸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이다.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수천 년간 한민족의 희로애락과 함께해 온 살아있는 역사이자 정체성 그 자체다. 제3부: 심층 분석 - 왜 지금, ‘문화 전쟁’인가? 이러한 문화 논쟁이 2020년대 들어 유독 격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양국 네티즌 간의 감정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복합적인 정치·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다. 1. 내부 결속을 위한 ‘외부의 적’: 중국의 신(新) 애국주의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역사와 문화를 국가 중심의 서사로 재편하고, 젊은 세대에게 극단적인 애국주의와 중화사상을 주입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미중 패권 경쟁 등으로 내부적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얽혀 있으며,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공격하기 좋은’ 표적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한류의 세계적 성공에 대한 시기와 견제 심리 또한 이러한 흐름에 불을 지폈다. 2. 악화된 상호 인식과 ‘MZ세대의 반격’ 사드(THAAD) 사태와 한한령, 홍콩 민주화 시위, 코로나19 책임론 등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대중(對中) 인식은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공정과 정의에 민감한 한국의 MZ세대는 중국의 불합리한 주장과 역사 왜곡에 대해 과거 세대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직설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논쟁을 주도하고, ‘#hanbok_is_korean_traditional_clothes’와 같은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며 국제 여론에 호소한다. 이는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문화적 자존감의 발현이자, 기성세대의 외교적 수사(레토릭)를 넘어선 새로운 방식의 저항이다. 3. 알고리즘이 증폭시키는 ‘디지털 민족주의’ 유튜브, 틱톡, 웨이보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이러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확성기 역할을 한다. 양국의 사용자들은 각자의 플랫폼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확증 편향’에 빠지기 쉽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성향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하며 사용자를 ‘필터 버블’ 안에 가두고, 이는 상대국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온라인상의 ‘사이버 전사’들은 사실 관계의 확인보다는 감정적인 비난에 몰두하며, 이는 합리적인 토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제4부: 파장과 전망 - 상처뿐인 싸움, 해법은 없는가? 1. 깊어지는 감정의 골, 미래 관계의 암초 김치와 한복 논쟁은 양국 관계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양국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 간의 감정의 골이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깊어졌다는 점이다. 정치적, 경제적 갈등은 이해관계에 따라 봉합될 수 있지만, 역사와 정체성을 건드리는 문화 갈등은 마음속 깊은 곳에 앙금으로 남아 장기적인 관계 발전에 심각한 암초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때 한류의 최대 소비 시장이었던 중국 시장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으며, 문화 교류는 단절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2. 정부의 딜레마와 미디어의 역할 양국 정부는 이러한 갈등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민적 분노가 들끓는 상황에서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은 때로 ‘저자세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자극적인 보도로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기보다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갈등의 배경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장기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할 책임이 있다. 3. 전망과 제언: 존중 없는 교류는 불가능하다 김치와 한복 논쟁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구도와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대응과 함께 장기적인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첫째, 학술적·논리적 대응 강화가 필요하다. 감정적 대응을 넘어, 김치와 한복의 역사적 독자성을 명확한 근거와 데이터로 정리하고, 이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 교류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일방적인 한류 전파를 넘어, 상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쌍방향 교류를 모색해야 한다. 문화는 우열을 가리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공유하며 풍성해지는 인류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 외부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의 가치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김치와 한복 논쟁은 우리에게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총성 없는 전쟁의 끝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상처뿐인 승리가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과 이웃을 대하는 성숙한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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